(이 글은 약 5개월간 연재된 1부 '일본 여친에게 프로포즈 받다', 2부 '일본 아내, 한국 며느리로 인정받다'에 이은 시즌 3 '일본 아내, 세 아이를 낳다' 입니다. 1, 2부 시리즈를 읽고 이 글을 읽으시는 게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외전] '알딸딸' 한국아빠의 '일본주부' 체험 (총 4화)
일본 아내의 세 아이 출산기 (1부)일본 아내가 장인어른을 싫어하는 이유(2부) 연재중단없이 주욱 밀고 나가려 했는데 2주나 쉬어 버렸다. 죄송하다.
지지난 주는 한국에서 양희은 씨가 왔다. 6월 7일 혹은 14일에 방송될 '양희은의 오색오미'(mbc)의 일본촬영을 위해서다. 주말 촬영이 워낙 정신없이 진행돼 도무지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지난 주도 그랬다. 한국에서 갑자기 사람이 오고 또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기 추도식 때문에 많이 마셔 버렸다.
어느샌가 이 글은 일요일 새벽에만 쓰는 글이 돼 버렸다. 4시 30분에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회사에서는 안 써지고, 일요일 대낮에는 아이들 때문에 못 쓴다.
그나마 '딸딸이' 아빠일 때는 노력하면 가능했었다. 하지만 '알딸딸' 아빠가 되니 100% 불가능해 졌다. 한 명만 늘어났을 뿐인데 둘과 셋의 차이는 천지차이다.
그래도 미우가 많이 자랐다. 만 네살 밖에 안된 조그만 아이가 엄마 일을 도와주고, 둘째 유나를 지도(?)하고, 막내 준과 놀아준다.
옛날 어른들은 "아이고! 그 녀석 다 컸네"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예전엔 그 말이 과장된 것이라 생각했는데, 요즘 미우 하는 걸 보면 옛 성현들 말씀 하나도 틀린 것 없다.
▲ 오른쪽이 미우. 다 컸다. ©jpnews/다카하시 미와코 | |
한번은 준의 기저귀를 능숙하게 갈고 있는 미우에게 말을 걸었다.
"미우야."
"응?"
"정말 우리 미우 다 큰 것 같아."
"아닌데..."
미우가 '아니'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다시 한번 물었다.
"어? 왜 아니야?"
"그건... 난 아직 네 살이잖아."
"그럼 몇 살이 되면 다 큰 거야?"
"서른 네 살!"
이런, 서른 네 살은 나와 미와코의 나이다. 지금 미우에게 있어 다 컸다는 것은 적어도 엄마 아빠 나이는 돼야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대견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제대로 아빠노릇을 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미우는 06년 1월 7일에 태어났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아무런 계획없이 덜컥 생겨버린 미우 때문에 미와코는 결국 다니던 부동산 회사를 관뒀고 우리는 장인어른 집으로 들어갔다. 집세 내기조차 힘들었다. 당연히 생활 자체가 안됐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일본에서 임신과 관련한 치료는 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는다. 의료 저널리스트 지쿠마루 야스코는 왜 임신은 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을까라는 내 물음에 이런 말을 해 줬다.
"임신은 병이 아니니까." 그렇군! 단순명쾌한 명답이다. 11월이 되자 병원측에서 물어 왔다. 가족출산을 할 것이냐고. 미와코는 내가 꼭 옆에 있어주길 바랬고 나도 첫 아이가 태어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가족출산을 신청했다. 일본말로는 다치아이(立会)다. 다치아이 신청을 하자 나도 이런저런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간호사는 남편이 교육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아무런 준비없이 출산하는 것을 보면 쇼크를 받을 수 있거든요. 섹스리스에 빠지는 부부도 있고, 심지어 출산 현장에서 남편이 기절하는 경우도 있어요." 첨엔 이해가 안 됐는데 출산 비디오를 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그로테스크 했다. 간호사는 "출산시에는 아내의 얼굴만 보는 게 좋다"고 말한다. 그만큼 아이가 나오는 광경은 신비로우면서도 공포스러웠다.
원래 미우의 예정일은 1월 2일이었다. 배가 산만큼 부풀어 오른 미와코는 예정일이 다가오면서 걱정스런 표정이 됐다. 아이를 낳는다는 두려움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 돈 걱정이 더 컸다. 휴일에 낳으면 돈이 더 든다. 평일보다 약 20% 정도 더 비싸다.
미우가 우릴 위해 효도한 것인지 아니면 미와코가 필사적인 노력으로 임신을 늦췄는지 몰라도 휴일이 끝난 1월 5일 새벽 진통이 찾아왔다. 그날 밤 미와코가 갑자기 입을 연다.
"오빠, 시계 좀 봐 줘." 정확하게 심야 1시였다. 처음엔 왜 시계를 보라고 했는지 몰랐다. 표정도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 같지 않았다. 잠시 후 미와코는 또 물어왔다.
"지금 몇 시야?"
"1시 20분." 몇 번을 되풀이했다. 미와코는 정확하게 20분 간격으로 물어왔다.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진통?" 미와코는 두려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것 같아. 점점 빨라지는 것 같아." 장인어른에게 알렸다. 이미 잠자리에 든 장인도 급히 일어나 "차 빼 올테니까 병원 갈 준비해"라고 말씀하신다. 병원에 전화했고 미리 싸 둔 짐가방을 둘러맸다.
장인어른이나 나는 마음이 급해지는데 정작 미와코는 별다른 동요가 없다. 미와코의 놀라운 침착성은 첫 아이를 낳는 순간에도 여지없이 발휘됐다. 대단하다.
새벽 2시를 넘겨 무사시노적십자 병원에 도착했다. 전통있는 종합병원으로 산부인과 시설도 괜찮다. 마침 당직 중 한 명이 미와코를 몇 번이나 봐 준 선생이었다. 이쪽은 급해 죽겠는데 그 선생은 뭐가 그리 좋은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조금만 있으면 아주 행복한 순간이 와요." 산모를 달래기 위한 말이었겠지만 20분 간격으로 얼굴을 찡그리는 미와코 역시 선생의 그 말을 듣고 환하게 웃었다. 대단한 선생에 대단한 산모다.
칸막이가 쳐 진 대기실을 배정받았다. 이 안에서 계속 대기하고 있다가 아이가 나올 것 같으면 분만실로 이동하는 그런 구조다 (보다 고급스러운 산부인과는 칸막이 대기실이 아니라 아예 방을 배정받는다). 이런 대기실이 열 개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진통시간은 점점 간격이 줄어들었다. 20분은 15분이 됐고, 좀 지나자 10분 간격으로 진통이 찾아왔다. 그런데 아내는 고통스러운 표정만 지을뿐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나 역시 아내의 등을 쓸어내리며 같이 라마즈 호흡을 해 댔다.
갑자기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분만실에서 누군가가 아이를 낳고 있었던 모양이다. 전혀 몰랐다. 알 수가 없다. 비명소리 하나 안 들렸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이 산부인과 너무나 조용하다.
대기실에는 다른 산모들도 있었는데 '쉬익 쉬익'하는 거친 숨소리만 들릴 뿐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간혹 새로운 산모가 대기실 쪽으로 들어오는 소리는 들려도 대기실만 들어가면 다들 조용해졌다.
그리고 종종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참 신기했다.
한국에서는 아이 낳을 때 별의별 비명소리가 다 들린다. 한 선배는 가족출산했다가 머리카락이 수백 올이나 빠졌다. 형수는 선배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야! 이 자식아! 내가 너 때문에!!"라며 몇 번이고 화를 냈단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비춰지는 출산 장면도 산모의 비명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2006년 1월 5일 새벽의 무사시노적십자 병원의 산모들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나중에 미와코에게 물어봤다.
"그랬어? 잘 모르겠는데 참아야 한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 소리지르면 다른 산모들에게 웬지 미안하잖아. 시끄럽기도 하고." 세상에, 일생에 있어 가장 큰 고통이라는 아이낳는 순간에도 다른 사람을 배려한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병원 간호사에게도 물었다.
"대기실에선 모르겠는데 분만실에선 될 수 있으면 소리를 지르지 않도록 유도하지요. 다른 데선 잘 모르겠는데 우리 병원은 대기실과 분만실이 붙어 있어서 소리가 다 들리니까요. 분만실에서 냅다 비명을 질러 버리면 대기실 산모들이 공포스러워 할 수 있잖아요?"
그제서야 이해가 됐다. 일본은 소자녀화로 유명한 나라다. 대부분 아이 한 명을 낳는다. 즉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산모들 대부분이 처음으로 '출산'을 경험할 확률이 매우 높다. 이런 상황에서 분만실의 비명소리를 듣게 된다면 상당히 두려워진다.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원초적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니. 여자는, 아니 어머니는 위대하다.
▲ 무사시노적십자 병원. 긴급구호체재가 잘 갖추어져 있어 도쿄에서도 아주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병원 중 하나. 큰 딸 미우는 여기서 2006년 1월 7일 태어났다. ©jpnews/박철현 | |
아무튼 금세 나올 것 같았던 미우는 그제서야 지구전에 돌입했다. 간호사는 아무리 길어도 대여섯 시간 진통하면 나온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만 하루가 지나고 그 다음 날도 지났다. 20분에서 15분, 10분까지는 쉽게 내려왔는데 그 밑으로 안 내려간다.
10분 간격의 진통이 만 하루동안 지속됐고 병원에 온 지도 꽤 지났다. 미와코는 허리와 엉덩이가 너무 아파 죽을 것 같다고 호소했다. 안쓰러웠다. 전부 내 책임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등을 쓸어내리거나 "괜찮아"라고 격려해주는 정도에 불과했다. 정말 무력했다.
이대로 가다간 산모도 아이도 죽을 것만 같아 의사 선생한테 부탁했다. 너무 고통스러워 하니 제왕절개 수술을 하면 안 되겠냐고. 미와코도 옆에서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의사 선생은 가차없었다.
"제왕절개 수술 대상이 아니예요. 충분히 산모 스스로 낳을 수 있어요. 남편도 같이 낳는다고 생각하고 우리 마지막까지 힘 냅시다."
그는 촉진제도 안 쓸 것이라 말했다. 자연적 파수(破水)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비명은 지르지 않았지만 힘이 다 빠져 지금 당장이라고 죽을 것 같은 미와코에게 충분히 낳을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600명 이상의 아이를 받아냈다는 선생 말이다. 하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난 전혀 신뢰할 수 없었다.
1월 7일 새벽 3시. 마흔 몇 시간만에 미와코가 힘빠진 목소리로 말한다.
"오빠, 터진 것 같아..." 마흔 시간 넘게, 아니 지난 10개월 동안 기다렸던 순간이 다가왔다.
■ 4부 '진통은 길었지만 출산은 금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