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내 손은 열 번도 넘게 점퍼 안주머니를 들락날락 했다. 며칠 전 아는 후배로부터 받은 물건을 아직 사용하지 못하고 이렇게 손으로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주위의 사람들은 별로 없다. 혹 있다고 해도 나에게 뭐라할 사람은 없다.
그래도 왠지 선뜻 물건을 꺼낼 용기가 나질 않는다. 또다시 손을 넣어 한 번 더 만져본다. 드디어 결심을 하고 물건을 꺼냈다. 자동차의 안테나처럼 생긴 것을 쭉 뽑았다. 그리고 '토닥 토닥' 땅을 짚어 본다. 어? 그런데 의외로 걷기가 편하다. 늘 다녀서 아는 길이지만 내 앞에 장애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니 주춤주춤하던 걸음이 조금씩 빨라진다.
평소 10 분 걸리던 길을 5 분만에 도착했다. 드디어 집 근처까지 왔다. 재빨리 다시 접어 안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곤 다시 주춤주춤하는 걸음으로 바뀐다. 아직 흰지팡이를 든 아들의 모습을 어머니께 보여드릴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며칠을 몰래 가슴속에 품고 다니던 흰지팡이를 어느날 그놈의 술 때문에 어머니께 들키고 말았다.
평소보다 조금 많이 마신 다음 날 아침 일어나니 지팡이가 보이질 않는다.아뿔사! 어젯 밤 집에 들어와서 지팡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는다는 것을 잊고 그대로 현관에 방치한 모양이다. 할 수 없이 모르는체 하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어머니가 한 말씀 하신다.
"지팡이 안가지고 가냐? 넘어지거나 부딪히지 않게 잘 가지고 다녀라."
속으로야 드디어 지팡이를 들게 된 아들을 보고 가슴이 아리셨겠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오히려 지팡이를 챙겨 주시는 어머니께 정말 뭐라 말할 수 없는 죄스러움과 고마움을 느꼈다.
지금은 늘 사용하고 있는 케인(시각장애인용 흰지팡이)를 처음 사용할 때의 이야기다. 장애인 등록 후 알게된 시각장애인 후배(아니 시각장애인으론 선배가 된다.)로부터 케인을 하나 받았었다. 그런데 그걸 사용할 용기가 없어서 매일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만 했다. 다행히 안테나처럼 줄어드는 형태여서 줄이면 주머니에 쏙 들어갔다.
전에 컴퓨터가 내 인생을 바꿨다고 말한 적이 있다. 컴퓨터와 함께 내 인생을 전환시켜준 또 하나의 물건이 케인이다. 시각장애인은 이동과 정보 습득이 가장 큰 문제이다. 나의 경우 이 두가지 문제를 이동은 케인으로 정보 습득은 컴퓨터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 물론 케인이 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케인을 통한 이동의 자유는 매우 편리해지는 것이 사실이다.케인은 시각장애인의 상징이다. 보통 저시력의 시각장애인들은 케인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나 역시 그랬다. 자신이 시각장애인임을 스스로 인정하기 싫은 이유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시각장애인이라고 말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내가 매우 좋아하는 노래가 있다. 가수 김광석이 부른 일어나라는 노래이다. 그 노랫말 중에 '인정함이 많을 수록 새로움은 점점 더 멀어지고..'란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을 매우 좋아했다. 그런데 내가 시각장애인이 되고 점점 눈이 안보여지면서부터는 '인정함이 많을 수록 새로움은 점점 가까워지고'가 되었다.
자신이 시각장애인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더욱 힘들어 질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이 시각장애인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오해도 받기 쉽다. 내가 일반회사에서 근무 할 때는 인사도 안하는 버릇없는 사원으로 오해를 많이 받곤 했다. 회사 복도에서 상사를 만나도 누가 누군지 알지 못해서 인사를 거르거나 특히 회사 주변에서 그런 오해를 많이 받았다.
퇴근 후 가볍게 한 잔 하려고 호프집에 들러도 다른 좌석에 있던 선배나 동료 등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직원 한사람 한사람 찾아다니며 '내가 눈이 나쁘다.'고 확인을 시켜줄 수도 없고...
눈이 점점 나빠지면서는 눈 앞에 있는 은행의 입구를 찾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멀쩡한 놈이 이상한 일이네?'하는 반응이다. 더욱 힘든 것은 치한으로 오해를 받는 경우도 있다. 시력이 나쁜 사람은 자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손을 앞으로 내미는 습관이 있다.
특히 행동이 변화할 때 그렇다.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문으로 들어설때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경우이다. 만약 그때 앞에 젊은 아가씨라도 있다면 손의 위치와 가슴의 위치가 비슷해진다. 딱 치한이 되는 순간이다. 케인을 사용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그런 오해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길에서도 자연스럽게 길을 물어보기도 하고 오히려 내게 다가와 길을 가르쳐 주겠다는 친절한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과 일본 모두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시각장애인 특히 전맹이나 고도의 저시력 시각장애인에게 케인은 필수가 된다. 그러나 케인만으로 이동의 모든 베리어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길 위에 무질서하게 늘어선 많은 장애물들. 가게에서 내다놓은 물건이나 점자블록 위에 올라않는 간판, 심지어는 길에 심어놓는 가로수나 전봇대들도 시각장애인에게는 엄청난 베리어가 된다.
특히 한국에서 가장 심한 베리어는 불법주차한 자동차이고 일본의 경우는 자전거가 엄청 시각장애인을 괴롭힌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제일 무서운 것은 공사 소음이다. 내가 가고자 하는 앞에서 공사하는 소리가 들리면 그때부터 엄청난 노르아드레나린이 분비된다. 온몸의 신경은 긴장되고 솜털까지 곤두선다. 한국에서는 그랬다. 이건 그냥 가다가 부딪히는 정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내가 한국에서 장애인 컴퓨터 강사를 할 때 내게 컴퓨터를 배웠던 한 분은 지하철 공사현장에서 추락하여 척추를 다치는 부상을 당했다. 시각장애를 가진 상태에서 지체장애까지 겹친 것이었다. 그 분은 아직도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한다. 이렇게 공사 현장은 정말 무섭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런 문제를 상당히 시정한 것 같다. 일본에도 공사를 하면서 열어 놓은 맨홀에 시각장애인이 빠진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간혹 공사중엔 '베리어프리'가 아니라 베리어를 만들어 주면 좋겠다는 농담도 하곤 한다.
그러나 내가 겪어본 일본의 공사는 그리 위험한 곳이 없었다. 오히려 매우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기까지 했다. 우선 공사 중 앞 뒤로 안내원이 배치된다. 시각장애인이나 고령자가 공사 현장을 지날 때 안전요원이 안내를 해주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하게 통과 할 수 있었다.
특히 시부야역의 내부 공사 과정에서는 감동(?)까지 받았다. 내가 주로 이용하던 이노카시라센에서 jr 야마노테센으로 이동하는 중간에 무슨 공사를 할때였다. 공사를 하면서 원래 있던 점자블록을 임시로 제거한뒤 다른 공간에 임시 점자블록을 설치했던 것을 경험했다. 임시 점자블록은 일반 점자블록과 달리 재질도 고무로 되어있어 임시로 설치한 것임을 알수 있었다. 이렇게 시각장애인이 이동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를 한다면 시각장애인에게 가장 괴로운 것의 하나인 이동상의 베리어가 해결될 수있다.
그러나 역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의식과 조그만 관심이다. 시부야역의 임시 점자블록처럼 작은 관심으로도 충분히 베리어를 줄일 수 있다. 간혹 한국에서 점자블록이 오히려 시각장애인을 위험하게 만든다는 고발 기사를 보곤 한다. 이것은 점자블록을 실제 설치하는 과정에서 세심한 면을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본다.
그렇게 되면 좋은 취지에서 시작한 일이 오히려 역효과를 가지게 된다. 작지만 세심한 배려를 통한 베리어의 해결이 그래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