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에 강한 회오리바람이 불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한국 걸그룹들의 선풍적인 인기. 수년간 혹독한 트레이닝으로 무장된 가창력과 댄스, 그리고 일본의 선남선녀들의 눈을 화려하게 수놓아준 섹시함까지, 한국의 걸 그룹이 일본열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가장 먼저 일본에 데뷔한 한국 걸그룹은 '포미닛'. 이어서 '카라', '브라운 아이드 걸즈' '소녀시대'들이 일본에 상륙하면서 일본열도를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팬들의 성향. 흔히 10대 소녀그룹에 대한 팬이라면 으레 남성팬들을 연상하기 쉽상이지만, 이례적으로 여성팬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일본의 10대들이 열광적으로 한국 걸그룹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단 한가지. '멋있다!'는 것.
물론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수년간 프로그램에 의한 혹독한 트레이닝으로 무장된 가창력과 춤, 거기에다 하나같이 꼭 맞춘 것처럼 늘씬한 스타일 등, 요즘 10대들이 가장 지니고 싶어하는 신체조건을 갖췄다.
때문에 여성팬들은 '각-코 이이-(멋있어-) !'를 연발하고, 반면 남성팬들은 '섹시-! '를 외치는 것이다. 이외 중장년층들은 그야말로 보이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귀엽다!'로 귀결된다.
이처럼 한국 연예인에 대해 성별, 연령에 관계없이 골고루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다. 한류스타 원조로 일컫는 '욘사마' 배용준만 해도 주류 팬은 '아줌마군단'이었고, '대장금'의 이영애는 '아저씨군단'이 팬이었다.
반면 일본 아이돌 그룹은 어떨까?
일본의 인기 아이돌 그룹의 특징은 '귀여움'이다. 10대의 발랄함과 귀여움을 상품으로 내세워 활동하다가, 20대가 되면 버라이어티쇼 등의 게스트로 전환하여 탈렌트, 혹은 연기자로 변신하여 연예 활동을 계속한다.
이같은 저변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 바로 가수이면서도 정작 절대적으로 갖추어야 할 가창력이 아이돌가수들에게는 한참 수준미달인 것. 때문에 10대에는 노래는 못하지만 10대만이 가질 수 있는 '귀여움'으로 상품화 했다가, 20대 성년이 되면 자연스럽게 다른 장르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 실례가 바로 '모닝그 무스메'. 10대 초・중반의 소녀들을 중심으로 그룹을 결성, 일본 10대들에게 돌풍같은 인기를 끌었다가 지금은 그 흔적마저도 미미할 만큼 존재성이 사라져버렸다. 가수로서 가창력도, 그렇다고 앳띤 '귀여움'마저 사라져버린 20대를 훌쩍 뛰어넘은 '모닝그 무스메' 걸그룹은, 이제 추억속의 과거 인물이 되어버렸다.
이렇듯 한국 걸그룹의 일본내 활동은, '모닝그 무스메' 등 아이돌 여가수들에 대한 향수가 진하게 나타날 즈음해서, 그 틈새를 아주 절묘하게 맞춰 이루어지고 있다. 노래, 댄스, 마켓팅 이 삼박자가 딱 들어맞은 것이다.
그런데 한국가수들의 일본활동은 비단 아이돌그룹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다.
최근 아들 이루에 대한 스캔들로 한동안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중견가수 태진아씨가 일본내 활동에 대단히 적극적이다. 한달에 몇차례씩 현해탄을 오갈 정도로 일본공연에 공을 들이고 있다.
물론 이전에도 한국의 중견가수들이 일본에서 활동을 한 적이 있다. 70년대 후반의 이성애, 80년대 중반부터는 조용필, 계은숙, 김연자, 나훈아, 김수희, 주현미 등이 일본 무대에 섰다. 하지만 조용필, 계은숙, 김연자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가수들은 일본에서의 '무명'대우를 견디지 못하고 일본활동을 접었다. 나훈아씨만이 가끔씩 디너쇼에 출연할 뿐이다. 그나마 조용필, 계은숙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본활동을 전면 중지한 상태.
이런 상황에서 태진아씨가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현재 일본에서 엔카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가수로는 김연자. 정재은, 장은숙 정도가 있다. 태진아씨에 대한 일본가요계 평가는 아직 불투명 그 자체. 한국에서는 톱가수지만 일본에서는 철저하게 '무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몇년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올해 4월에 일본가요계에 정식으로 데뷔한 중견가수가 있다. 킨타로(金太郞: 한국명 김영근)씨. 그를 만난 것도 우연이었다. 지난 8월 우에노 마츠리(축제) 축하 공연때 일본가수들과 함께 무대에 선 것.
처음에는 킨타로라는 이름이어서 당연히 일본가수인줄 알았다. 나중에 그의 의상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가 한국인 가수임을 알 수가 있었다. 그 무대에는 이미자씨의 딸인 정재은도 함께 출연했다. 정재은 킨타로씨를 보자마자 '삼촌'이라며 달려와 반가움을 표시했다고.
"일본에 온 지 12년만에 올해 4월 21일 공식 데뷔를 했어요. 제 의상이 특이한 것은 제가 직접 디자인해서 입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름은 킨타로이지만 한국인이라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개량한복을 무대복으로 정했어요. 남한을 상징하는 남색과 우리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하얀색 등 노래와 춤, 그리고 한국을 나타내는 그런 무대복을 만들어 입었는데, 일본관객들의 반응이 무척 좋습니다."우에노 공연이 끝난 뒤,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무대의상에 대한 질문을 하자 의외로 직접 디자인한 옷이라고 답하는 킨타로씨. 꽤 늦은 나이에 드물게 일본가요계에 데뷔를 한지라 일본에 오게 된 동기부터 물었다.
"약 20여년 전, 오사카 공연을 왔을 때 그때 제가 '한오백년' '간양록'을 부른 후 무대에서 '살풀이 춤'을 춘적이 있어요. 그런데 저를 좋아하는 한 일본기업의 연로한 회장이 유언처럼 저의 노래와 춤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고 해서 오사카에 오게 됐지요. 그 때부터 개인적으로 조그만 무대에 서며 지금까지 일본에 눌러 살게 됐어요."춤!? 과거 중견가수로부터 '춤'이란 말을 듣고, 또한 그의 한국이름을 살펴보니 어딘가 많이 낯이 익은 이름이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니 그와 관련해서 '짝꿍'이라는 말이 나왔다. 가수겸 '짝꿍' 안무가 김영근(일).
그렇다! '짝꿍'은 한 때 80년대 중반에 젊은이들에게 있어 '아우라' 같은 존재였다. 당시 쇼프로그램이 많았던 시절, 노래 부르는 가수 뒤에서 발랄하고 깜찍한 모습으로 춤을 추던 한무리의 젊은 댄서들. 특히 '짝꿍'은 그 당시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젊은이의 행진' 의 전속 댄스 그룹이었다. 그래서 짝꿍의 새멤버들을 뽑기 위한 오디션을 할 때는 여대생들이 떼지어 방송국 앞을 서성거리기도 했었다.
"한국에서의 데뷰곡은 '시골풍경'이란 노래예요. 그 노래로 그해 신인상을 받았죠. '가렴아'라는 노래는 가요톱텐에 들었었구요."
하지만 김영근 혹은 김영일이란 이름은 노래보다는 오히려 안무를 맡았던 '짝꿍'에서 더 인정을 받았다.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지요. 당시 9년간 kbs에서 전속 안무가로 활동할 때는 한국에서 내놓으라 하는 가수치고 우리집에서 밥한번 먹지 않은 연예인이 없었어요. 특히 민해경이 자주 찾아왔고, 지금 투병생활을 하는 방실이는 우리집에서 6개월간 안무를 배우며 숙식을 했지요. 아마 한국톱스타 반 이상은 우리집을 거쳐 갔을 거예요. 나중에는 개그맨들이 우리집에 와서 아이디어 회의를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우리집 옷장에는 늘 남자 속옷 30벌, 여자 스타킹이 수십여켤레씩 준비돼 있었습니다. 제가 가수이면서 안무를 가르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연예인이 몰릴 수밖에 없었지요."
가수가 안무가로서 한 방송국에 9년간이나 전속한 경우는 지금까지 전무후무 한 일이라고.
한국에서의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로 인순이와의 공연을 첫손가락에 꼽았다.
80년 중반 당시, 인순이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가수. kbs '나이트쇼'에서 매주 가수 한명을 선정하여 한시간 동안 노래, 춤, 인터뷰 등을 곁들여 방송하는 준 다큐멘터리 쇼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마침 김영근씨가 선정되었다.
"원래 프로그램의 타이틀은 '김과 짝꿍'이었어요. 당시 짝꿍이 엄청 인기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그때 담당 pd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인순이를 출연시키고 싶다구요. 인순이가 무척 착했거든요. 노력파였구요. 결국 제 뜻대로 '나이트쇼'는 저와 인순이가 함께 듀엣으로 노래부르고 춤추고 했지요. 다행스럽게도 그 프로그램은 그해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눈에 선한 무대이지요."
킨타로씨가 가수로 데뷔한 것은 17세때. 초등학교 때부터 각종 콩쿨대회를 휩쓸었다고 한다. 특히 여성극에 감각이 뛰어났고, 음악에 대한 청음은 악보를 볼 줄 몰라도 윤복희 바니걸즈와 함께 당대 최고로 뛰어났다는 것.
일본의 데뷔무대는 성대했다. 보통 일반가수들은 기자회견 겸 간단하게 신곡을 부르는 프로모션으로 끝나는데 비해, 킨타로씨의 데뷔무대는 관객이 있는 일반극장에서 정식으로 공연을 했다.
신곡발표회 형식으로 공연을 했는데, 킨타로씨가 메인가수로 등장했다. 또한 팜플렛 앞 표지에도 다른 일본가수들을 제치고 그의 사진과 프로필을 싣는 등 파격적인 '특별대우'를 해주었다. 그것은 그동안 킨타로씨가 한국가수로서 관서지방에서 크고 작은 공연을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지명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인이지만 그 능력을 높이 산 것.
데뷔무대는 대성공. 데뷔곡인 <의연하게 피는 꽃(凛と咲く花)>은 노래에 얽힌 깊은 사연과 함께 현재 관서지방에서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의연하게 피는 꽃>은 양팔이 없는 여성화가 오오이시 준쿄(大石順敎:1888-1968)의 일생을 그린 노래. '호리에 유곽'에 양녀로 들어가 10세때 양부에 의해 양팔을 잃었다. 일본에서 '호리에 6일 살인사건'은 아직도 잔인한 살인사건에 회자될 만큼 유명한 사건. 양부가 일가족 6명을 살해한 가운데 다행히 준쿄는 양팔만 잘린 채 생명은 건졌다.
그 후 절망에 빠져 지내다 카나리아가 입으로만 지저귀는데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녀는 그때부터 입으로 참을 인(忍)자를 되뇌이며(그래서 그녀의 작품에는 유독 참을 인자가 들어간 난 그림이 많다) 서예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또한 그림을 계기로 24세 때 화가와 결혼, 1남1녀를 낳은 뒤 남편의 외도를 계기로 이혼했다. 이혼한 뒤에는 불교에 귀의, 불제자가 됨과 동시에 장애상담사가 되어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녀가 그린 그림과 서예는 세계에서도 각광을 받아 '일본의 헬렌 켈러'라는 호칭을 받았다. 말년에는 절에 자신과 같은 신체장애인을 위한 사회복지재단 '붓코인(佛光院)'을 설립, 오갈데 없는 사람들과 장애인 후학들을 양성했다. 이 재단은 지금도 그 후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이같은 오오이시 준쿄 여사의 일생을 담은 노래가 바로 킨타로씨의 <의연하게 피는 꽃>이다. 그것도 준쿄여사 사망 40년 기일을 맞이해서 이 노래를 발표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이든 일본인들이 이 노래를 무척 좋아한다는 것. '킨타로 매니어'들이 있을만큼 그의 공연에 는 매번 따라다니는 골수팬들이 있을 정도로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젊었을 때는 한국, 나이들어서는 일본무대에 서보니 비교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우선 일본은 미루는 것이 없어요. 그시간에 정확하게 시작합니다. 불가피하게 늦을 경우 5분이상 늦지 않습니다. 또 모든 스탭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지요. 그리고 아무리 작은 공연이라도 한두달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안돼요. " 일본의 공연 시스템이 부럽다는 킨타로씨. 최근 8월 29일 관서지방에서 가진 단독콘서트에도 그의 열혈팬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연말까지 그의 스케줄은 이미 꽉찬 상태.
"그의 노래와 춤사위에 반해 80년대부터 매번 콘서트에 앞자리를 지키는 재일동포 분도 계세요. 그의 노래에는 인생의 맛이 깃들어 있다고나 할까. 아마도 일본팬들도 같은 느낌이 아닐까요?" 이렇게 말하는 이는 우에노 공연 때 스탭으로 참여한 여성 관계자의 말.
이렇듯 최근 일본에는 늦깍이 데뷔를 하는 가수들이 부쩍 늘고 있다. 3년전, 꽃집을 운영하는 아키모토 준코라는 중년여성이 59세의 나이에 '아이노마마데(愛のままで)'란 노래로 뒤늦게 데뷔, 이곡이 중장년층 사이에 대히트를 하는 바람에 작년 nhk가요홍백전까지 출전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에 보조를 맞추듯 한국에서도 태진아, 킨타로씨 등 중견가수들이 잇달아 일본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번 공연하면 반드시 다음 공연제의를 꼭 받는다는 킨타로- 김영근씨. 한창 인기를 얻고 있는 관서지방에 이어 과연 관동지역까지 그 바람을 몰고 올 지 애정을 갖고 지켜봐야 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