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는 소녀만화라고 부르는, 순정만화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사랑 이야기를 딱히 싫어하지는 않는다. 로맨스, 멜로 같은 장르도 보기는 한다. 다만 만화로 말한다면 한 4, 5권 정도 보고 나면 지친다. 밀고 당기고, 혹은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만을 계속해서 보기가 어렵다. 걸작의 경우는 좀 다르지만, 대체로 그 정도다. 다만 사랑 이야기와 함께 무엇인가가 동시에 진행된다면, 끝까지 보게 된다.
모리 카오루의 <엠마> 같은 경우가 그렇다. 엠마는 물론 주변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을 잡아내는 솜씨도 훌륭하지만, 그밖에도 여러 가지 즐길 것이 있다. <엠마>에는 빅토리아 시대의 '풍경'에 대한 탁월한 성취가 있다. 귀족이 몰락하고 부르조아가 번성하게 되는 시대적 조류 속에서,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느낄 수도 있다. 오래 전 <북해의 별>이나 <올훼스의 창> 같은 만화를 끝까지 봤던 것도 그런 이유다. 굳이 시대나 사회 같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좋다. 사랑의 감정에만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그들이 성장하고 변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잡아내도 좋다. 그래서 하라 히데노리의 <내 집으로 와요>도 재미있게 봤다.
이야기하다보니 순정만화라고 해도 잘 만든 작품이면 좋다는 말과도 비슷해졌다. 사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사랑의 감정을 충실하게, 세부까지 예리하게 포착한 순정만화를 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고 새롭다. 소재가 주는 흥미도 크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있다. 이와모토 나오의 <동네에서 소문난 텐구의 아이>가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제쳐두었던 것은, 순정만화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고등학생 남녀 아이들이 알콩달콩 주고받는 사랑 이야기에 요즘 유행하는 판타지를 좀 섞은 정도라고 지레 판단해서. 그런데 우연히 보기 시작해서는, 완전히 빠져버렸다. 한마디로 정말 재미있고 사랑스럽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문학 장르 중에서 '어반 판타지'(urban fantasy)라는 것이 있다. <반지의 제왕>처럼 가상의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판타지가 아니라, <해리 포터>나 <트와일라잇>처럼 현실의 시공간에서 초자연적인 존재와 현상이 공존하는 판타지를 말하는 것이다. 어반 판타지가 인기를 끄는 이유 하나는 현실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루한 일상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지금 이 곳에서도, 뭔가 신기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내가 모르는 일들이 세상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것처럼, 조금만 눈을 돌리면 다른 세계가 펼쳐질 수도 있다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뱀파이어와 사랑에 빠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나만의 눈에 보인다면, 지루한 일상 따위는 당장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래서 어반 판타지는 지금 청소년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텐구의 딸인 아키히메는, 인간인 엄마와 함께 마을에 살면서 중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런데 <동네에서 소문난 텐구의 아이>는 <트와일라잇>의 설정처럼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자신의 존재를 숨기면서 살아가지 않는다. 아버지 텐구는 마을의 산에 살고 있고,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아키히메의 친구인 소꿉친구 슈운은 텐구가 되기 위한 수행을 쌓고 있다. <동네에서 소문난 텐구의 아이>의 세계는 인간과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무렇지도 않게 공존하는 곳이다. 텐구와 인간의 혼혈인 아키히메는 자신의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고, 둔갑술을 펼치는 여우와 너구리도 인간과 공존한다. 뭔가 어리둥절한 상황이지만, 묘하게도 <동네에서 소문난 텐구의 아이>를 읽다 보면 너무나 자연스럽다. 지금 우리 곁에도 텐구나 둔갑하는 여우가 있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을 것처럼.
<동네에서 소문난 텐구의 아이>를 보기 전에 알아두면 좋은 상식들이 있다. 흔히 일본에는 8백만의 신과 요괴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요괴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다. 갓파 같은 것들은 때어날 때부터 요괴다. 말 그대로 인간과 다른 존재로서의 요괴. 그런데 인형 심지어 빗자루나 도자기 같은 사물들도 시간이 흐르고 이유가 있으면 요괴로 변하는 경우가 있다. 또 분노나 원한 같은 극단적인 감정에 사로잡힌 인간이 한계를 넘어서면 오니(鬼)로 변하기도 한다. 일본 요괴의 종류나 근원은 매우 다양하다. 그렇다면 텐구는 무엇일까? 사전에서 찾아보면, 텐구는 하늘을 자유로이 날고 깊은 산에 살며 신통력이 있다는, 얼굴이 붉고 코가 큰 상상의 괴물이다. 텐구 역시 원래 요괴인 경우도 있지만, 수행을 통해서 텐구로 변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특별한 수행을 쌓는 이들을 텐구라 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텐구를 비롯한 일본의 요괴는 사악한 괴물부터 평범한 이웃 같은 존재까지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다. 그런 존재들에 대해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듣고 익숙해졌다면, 진짜로 그들이 우리 곁에 있다고 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일본에서 유난히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발달한 것을, 그런 이유에서 찾기도 한다.
<동네에서 소문난 텐구의 아이>는 <트와일라잇>이나 <해리 포터>처럼 거대한 모험이나 대결을 그리지 않는다. 아키히메는 힘이 세다는 것 외에 친구들과 별로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예뻐지고 싶고, 동급생 타케루를 짝사랑한다. 아버지 텐구는 아키히메가 산속으로 들어와 수련을 통해 텐구가 되기를 바라고 있지만, 아키히메는 털복숭이 텐구가 되는 것이 정말 싫다. <동네에서 소문난 텐구의 아이>는 그런 아키히메의 일상을 소소하게 따라가는 청춘, 로맨스, 판타지다. 다만 초자연적인 현상이 태연하게 벌어지고 사람들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세계가 배경이고.
그게 그리 재미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악당도 없고, 대결도 없는 판타지가 과연 무슨 재미일까, 라고. 하지만 <동네에서 소문난 텐구의 아이>는 일상 자체가 너무나도 흥미롭다. <동네에서 소문난 텐구의 아이>의 세계에서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여우와 대화를 한다던가, 어깨에 들러붙은 요괴를 떼어낸다던가 하는 일들이 사춘기 소년 소녀의 일상과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 느낌 자체가 정말 신선하다. 지금 당장 나의 일상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세상은 더욱 흥미롭고 즐거울 것 같은 느낌이 절로 든다.
사실 우리가 판타지를 읽는 것은 그런 욕망 때문이다. 현실이라는 것은 대체로 힘들다. 혹은 지루하거나 따분하고. 그렇게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끼어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누구는 해리 포터의 모험을 떠올리겠지만, 그런 건 아주 예외적인 경우다. 귀신이 들린다고 해도, 대부분의 경우는 그냥 정신병원에 가는 정도로 끝난다. 그게 현실이고, 그게 일상이다. 그러니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 세계가 있다면 아마도 <동네에서 소문난 텐구의 아이>에서 벌어지는 모습 정도가 아닐까. 그것만으로도 아주 즐겁고, 흥미로운 판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