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일본 대중문화 관련 기사를 읽다보면, 댓글에서 자주 보게 되는 말이 있다. 뮤지션, 그 중에서도 특히 아이돌은 한국의 실력이 훨씬 월등하다는 주장이다.
최근 국내 아이돌 가수들의 실력은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동방신기, 빅뱅, 슈퍼 주니어 등의 춤과 노래 실력은 발군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만으로 국내 뮤지션이 일본보다 뛰어나다는 일방적인 주장이 가능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정확하게 수치로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경제 분야와는 다르게, 문화예술 분야의 우열은 분명하게 결정될 수 없다. 이를테면 미국과 프랑스의 영화는 어디가 더 뛰어날까?
▲ 동방신기 하라주쿠 쇼케이스 현장 ©jpnews | |
할리우드가 산업적으로는 훨씬 앞서 있고, 오락영화를 잘 만들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미국 영화가 프랑스 영화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미국이나 프랑스 영화가 아프리카 어느 국가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궤도 위에 오르고 나면, 그 때부터는 절대적인 우열이 아니라 개별적인 창작자나 작품의 우열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한 술자리에서 모 소설가에게 그런 주장을 들은 적이 있었다. 자신이 강의를 하기 위해 일본 드라마를 몇 개월 섭렵한 적이 있는데, 그 결과 드라마에 있어서만은 한국이 일본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결론을 내게 되었다고. 그 말을 들은 후, 반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전제가 있다. 최고 수준에 오른 드라마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 같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의 우열을 가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발리에서 생긴 일> <미안하다 사랑한다> <네 멋대로 해라> <궁> <커피 프린스 1호점> <대장금> 등 국내의 걸작 드라마들은 일본은 물론 해외의 어떤 드라마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한국 드라마도 세계적 수준이다.
하지만 시야를 좀 넓혀보면, 전체적인 시스템이 다를 수밖에 없다. 요즘에는 약간 느슨해지고 있지만, 일본 대부분의 드라마는 분기별로 방영된다. nhk 대하 사극이나 일일극 등을 제외하고는 3개월의 기간 동안 10-12회 정도로 방영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각 분기마다 20편이 넘는 새 드라마가 방영된다.
아사히, 니혼, 후지 등 중앙 방송국에서 제작하는 드라마만이 아니고 오사카와 교토 등 지역 방송국에서 제작되는 드라마도 있다. 장르도 일반적인 멜로와 휴먼 드라마만이 아니라 미스터리, 공포, 에로, 판타지 등 다양하다. 치밀하게 사전 제작준비를 하기 때문에, 한국처럼 쪽대본에 의지해서 촬영을 하는 경우가 없고 인기가 있다고 해서 회수를 늘리지도 않는다. 인기가 있다면, 1년 쯤 후에 새로운 시즌을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드라마가 한국의 드라마보다 다양하고,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다고는 말할 수 있다. 다만 시스템이 좋고 다양하다는 것만으로 '한국보다 드라마를 잘 만든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은 시스템도 취약하고, 다양성도 떨어진다. 하지만 일본은 물론 중국과 동남아에서도 인기를 끄는 드라마를 많이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드라마 제작 기술이나 작품의 완성도는 결코 뒤질 것이 없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하얀 거탑>이 병원 내의 권력 다툼을 냉정한 시선으로 치밀하게 관찰하는 것에 비해, 한국의 <하얀 거탑>은 인물에게 더 많이 다가간다.
일본이 이성적이고 객관적이라면, 한국은 정서적이고 감정적이다. 어느 것이 더 우월한가가 아니라, 시청자의 취향에 따라 선호가 갈릴 수밖에 없다. 한국의 문화예술을 작품 개별로 본다면 이미 세계 수준을 뛰어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부족한 것은, 그런 걸작과 수작들을 안정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시스템이다.
잠시 영화를 보자. 한국의 영화산업, 시스템이 할리우드에 뒤지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만들어내는 영화들 중의 걸작은, 할리우드에서도 만들어내기 쉽지 않는 작품이다. 홍상수와 김기덕의 예술영화만이 아니라 봉준호의 <괴물>, 박찬욱의 <올드 보이> 등은 할리우드에서도 주목할 만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할리우드에서 만들어내는 엄청난 규모의 블록버스터를 한국에서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걸작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이 있다는 것이 곧 할리우드만큼의 산업적 파워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또한 문화예술에서의 우열이, 다른 산업에서처럼 명백하게 그어지는 것도 아니다.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서, 뮤지션 그 중에서도 아이돌 이야기를 해 보자. 한국의 대중음악이 일본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다. 규모로 본다면, 한국 음악시장이 몇 수 아래다. 음악성으로 따진다면, 일본은 ymo처럼 해외 뮤지션들이 인정하는 스타도 이미 있었다. <스키야키>란 노래는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록 페스티벌은 물론 재즈, 레게 등 온갖 장르의 페스티벌이 일 년 내내 열린다.
재즈 시장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다. 미국과 유럽에서 음반을 낸 일본의 뮤지션들은 부지기수다. 큰 성공은 거두지는 못했지만, 인디 시장에서 인정받은 뮤지션 역시 무수하다. 한마디로 일본 대중음악을 산업적으로만 한정한다면, 한국보다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실력은 어떨까? 아이돌로 국한해 보자. 동방신기, 빅뱅 등의 노래와 춤은 일본 아이돌 그룹과 비교해 보면, 훨씬 뛰어나다.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춘다. 곡도 좋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일본 아이돌이 형편없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엄밀하게 말하면, 일본 아이돌들이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본기는 확고하다. 1시간 반 동안 뛰어다니면서 공연을 해도 마지막까지 목소리가 잘 나온다. 요즘 모닝 무스메나 akb48 등은 지나치게 '아이돌화'하면서 이미지에 치중하고 있지만, 예전 speed 같은 아이돌 그룹은 노래 실력에서도 발군이었다.
사실 요즘 일본에서 아이돌은, 뮤지션이라기보다 연예인에 가깝다. 노래를 정말 잘하기 때문에 아이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끼가 있고 카리스마가 있는 아이들을 아이돌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진짜 뮤지션이 되고 싶은 아이들은, 밴드를 만들거나 혼자 기타를 들고 거리에 나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정도(正道)다. 좀 인기가 생기면 자작 cd를 만들고, 클럽을 빌려 라이브 무대를 갖는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그의 실력을 인정하면 인디 레이블에서 음반을 내고 매니저도 생기게 된다.
최종 목적지는 메이저로의 부상이거나 인디에서의 확고한 자리매김이다. 그것이 뮤지션의 길이고, 아이돌의 길과는 전혀 다르다. 가끔은 유이나 야이다 히토미처럼 아이돌 같기도 하고 뮤지션 같기도 한 가수가 나오기도 하지만, 대개 뮤지션과 아이돌의 길은 확연하게 다르다.
일본에서 아이돌이 되고 싶으면 액터즈 스쿨 같은 곳을 다녀야 한다. 연예기획사는 오키나와나 후쿠오카 등 일본 전역의 액터즈 스쿨에서 재능이 있는 아이를 찾아내면 계약을 하고 직접 교육을 시킨다. 아무로 나미에 같은 경우가 그런 방식으로 스타가 되었다.
쟈니즈에서는 재능 있는 아이들을 공식 데뷔시키기 전에 쟈니즈 주니어로 운영하기도 한다. 노래와 춤은 기본이고, 연기 훈련도 시킨다. 다양하게, 연예인이 되기 위한 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아이돌이 인기를 얻는 방법도, 단지 노래실력만은 아니다. 이미지만으로도 아이돌이 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걸 놓고 '실력이 없다'고 한마디로 깔아뭉개기는 힘들다. 따지고 보면 한 분야에서 스타가 되었어도, 연기와 노래 실력이 없는 배우와 가수도 허다하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그러니 굳이 우열을 따지지 않아도, 우리가 자부심을 가질 이유는 충분하다. 문화예술 분야에서 우리의 대중음악과 영화, 드라마 등이 일본과 겨루어도 그다지 밀리지 않을 만큼 이미 성장해 있는 것이다.
올 상반기만 해도 동방신기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총 17만장 이상을 팔아 앨범 판매에서 총 17위에 오른 것이다. 한류이기 때문에 인기를 끈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인정받은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런 좋은 문화상품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다.
▲ 동방신기를 배경으로 찍는 일본 팬들 ©jpnew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