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9일 국내에서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칠흑의 추적자>가 3주 만에 관객 60만을 넘어서면서,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흥행 4위에 올랐다.
<명탐정 코난>보다 위에 있는 애니메이션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벼랑 위의 포뇨>로 모두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다. 세계적으로 미야자키 하야오 못지않은 명성을 얻고 있는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와 <이노센스>, 일본 오타쿠의 사대천왕으로 불리는 안노 히데아키의 걸작 <에반게리온 서> 같은 애니메이션보다 <명탐정 코난>이 더 인기를 얻었다고? 물론이다.
그런데 그런 현상은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흔히 일본을 애니메이션 왕국이라 부르기 때문에, 극장에서 개봉하는 애니메이션 대부분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극장 개봉하는 애니메이션 중에서 성공하는 것은 대부분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 작품과 tv 애니메이션의 극장판이다.
2008년 일본에서의 영화흥행 탑 10을 보면 1위가 <벼랑 위의 포뇨>이고 5위는 <포켓 몬스터:다이아몬드 펄>, 12위는 <도라에몽:노비타와 녹색의 거인전>이다. 안노 히데아키가 새롭게 만드는 <에반게리온> 시리즈는 시대의 걸작으로 인정받으면서 흥행에 성공했지만, 그 외에는 아무리 작품이 좋다고 해도 극장 개봉에서는 크게 성공하지 못한다.
오시이 마모루의 신작 <스카이 크로울러>도, 2008년 최고의 애니메이션으로 꼽히는 <갓파 쿠와 여름방학을>도, <퍼펙트 블루> <천년여우> <파프리카> 등 수작을 끊임없이 발표해 온 곤 사토시의 작품들도 극장개봉에서는 미미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건 큰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을 지탱하는 것은, 만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요즘에는 라이트 노블과 게임까지 연결된 굳건한 시스템이다. 만화나 라이트 노블로 발표되어 인기를 얻으면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고, 게임으로 확장되는 것이 일반적인 경로다. 그리고 극장 수익보다도 부가 판권과 관련 상품들로 얻는 이득이 훨씬 크다.
<포켓 몬스터>의 주된 수익이 카드 판매와 게임이었던 것처럼. 그래서 처음부터 원 소스 멀티 유즈를 고려하여 만들어지는 작품도 부지기수다.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 <명탐정 코난> 등 만화로 성공을 거둔 작품은 대부분 tv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고 그 중에서 초인기작은 1년에 한번씩 극장판으로 만들어진다. 독자적으로 극장판으로 만들어지는 애니메이션은 화제를 모으고, 수작으로 인정받기는 하지만 흥행면에서는 취약하다.
21세기 들어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가 큰 히트작이 없이 침체기에 접어들었다고 하지만 시스템 자체는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만화 히트작이 애니메이션으로 대성공을 거두는 왕도(王道)는 물론이고, 오시이 마모루나 곤 사토시처럼 예술적으로 인정을 받는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극장에서 성공을 못 거둔다 해도 dvd 등 부가 판권과 해외 시장에서의 수익 등으로 수지를 맞춘다.
큰 히트작은 없지만, 특정 마니아를 대상으로 작품이 세분화되면서 다양성이란 측면에서는 바람직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에덴의 동쪽>과 <도쿄 매그니튜드 8.0>처럼 원작 없이, 성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 tv 애니메이션도 만들어지는 곳이 일본이다.
반면 한국의 상황은 좋지 않다. 올해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하나도 개봉하지 않았다. 성공을 거두는 애니메이션은 <뽀롱뽀롱 뽀로로> <빼꼼> 등 주로 유아용이다. 우리 아이들은 어려서 <뽀롱뽀롱 뽀로로> <빼꼼> <방귀대장 뿡뿡이> 등을 보며 자라다가 초등학교 3, 4학년만 되면 바로 일본 애니메이션에 빠져든다.
<뽀롱뽀롱 뽀로로> <빼꼼> 등 국내의 유아용 애니메이션은 해외의 작품들과 견주어 봐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지만, 조금만 연령층이 높아지면 국내 애니메이션은 지지부진해진다.
뛰어난 원작이 없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다. 애니메이션은 어른들도 즐길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기본은 중학생 정도까지의 아이들이다. 청소년들이 즐길 수 있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고, 그 중에서 성인도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만들어지면서 점차 확장되어가는 것이다.
한국 만화는 성인 독자를 주요 타겟으로 하는 웹툰이 성장하긴 했지만 출판 만화의 히트작으로 쉽게 이어지지 않는다. 특히 아이들이 재미있게 볼 만화는 더욱 부족하다.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 노블, 게임 모두가 각개 약진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시스템화된 거대한 산업으로 모아지지 않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필요한 것은, 만화나 라이트 노블의 히트에서 tv 애니메이션으로 이어지는 안정적인 시스템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