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보기
일본6대일간지 ㅣ 정치 ㅣ 경제 ㅣ 사회 ㅣ 문화 ㅣ 연예 ㅣ 그라비아 ㅣ 스포츠 ㅣ 역사 ㅣ 인물 ㅣ 국제 ㅣ 뉴스포토 ㅣ 뉴스포토2 ㅣ 동영상 ㅣ 동영상2 ㅣ 독자 게시판
섹션이미지
일본6대일간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연예
그라비아
스포츠
역사
인물
국제
뉴스포토
뉴스포토2
동영상
동영상2
독자 게시판
회사소개
회원약관
개인정보취급방침
광고/제휴 안내
사업제휴 안내
소액투자
기사제보
HOME > 뉴스 > 인물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위안부들은 결국 속아서 온 거야" (1부)
[단독인터뷰] 구 일본군 군속이 말하는 종군위안소 충격적 실태
 
박철현 기자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들이 얼마나 두려웠을지..."
 
마쓰바라 마사루(85) 씨는 인터뷰 도중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담담하게 풀어나갔지만 역시 감정의 동요는 감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지바 현 아비코 시의 시민단체 '아비코 평화네트' 회원인 그는 65년전 제국해군 군속(군무원)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
 
마쓰바라 씨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들고있던 손가방에서 당시 자료들을 꺼낸다. 그리고 그는 다시 겉옷 속주머니에서 샛노랗게 물든 명함크기 증명서를 탁자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이게 그 때 사용한 군 위안소 출입증입니다."
 
▲ 마쓰바라 씨가 발급받았던 위안소 출입증. 1943년 11월에 발급받았다고 한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가로 5.8센티, 세로 10.8센티의 그 증명서에는 '남국료출입증(南国寮出入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위안소를 이용할 때엔 이 출입증을 가져가야 해요. 우리 부대 근처에는 두 군데가 있었죠. 하나가 여기 적혀져 있는 '남국료위안소'였고 또 하나는 '남성료(南星寮)위안소' 였습니다."

마쓰바라 씨는 "남국료와 남성료는 일본군 위안부들이 모여있는 시설로 군인, 군속들의 성적욕구 해결을 위한 시설로 사용됐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도 물론 남태평양 트럭(truck) 제도 일대로 배속된 1943년부터 '남국료'를 몇 번 이용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18~25세 정도되는 종군위안부들이 각 위안소에 5, 60명 정도씩 있었습니다. 44년부터는 더 늘어났어요. 마지막에는 아마 각각 70명 정도씩 되지 않았나 하네요. 일본인 위안부가 그중 10% 정도였고 나머지는 전부 조선에서 온 위안부들이었습니다."
 
1942년 제국해군 제4함대 시설대대에 배속된 마쓰바라 씨는, 43년 남태평양 마리아나 제도의 트럭제도에 둥지를 틀었다.
 
하루시마, 나쓰시마, 아키시마, 후유시마, 그리고 게쓰요시마, 가요시마, 수이요시마, 모쿠요시마, 긴요시마, 도요시마, 니치요시마 등 총 11개의 큰 섬과 100여개의 무인도로 구성된 트럭제도는 산호초로 둘러싸인 바다의 요새였다.
 
▲ 위안소 실태를 최초로 육성증언한 마쓰바라 마사루 씨. 그는 1998년 나카가와 농수산대신의 일본군 위안부 발언으로 인해 이 문제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그는 나쓰시마(夏島)에 주둔했고 이 안에 있는 두 위안소를 관리하는 시설대대 군속으로 일했다. 나쓰시마는 후방보급기지로 그 주변에는 각종 유곽, 술집, 식당, 옷가게 등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나쓰시마를 기준으로 각각 위 아래에 위치한 하루시마(春島), 아키시마(秋島)는 전투부대가 주둔했다. 양 섬은 물론 나쓰시마에 주둔하는 일본군 및 군속들은 일과가 끝나거나 휴일이 찾아오면 나쓰시마의 두 위안소를 이용했다.
 
"위안소 접수대엔 위안소를 이용하려는 군인들로 바글바글했습니다. 한산한 경우를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전투태세에 들어가거나 중요한 훈련이 있는 날엔 한산했을 수도 있지만 저도 그 땐 작전에 참가해야 하니까 실제로는 어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평균잡아서 종군위안부 한 명당 하루에 14, 15명 정도는 받아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1시간 10분간에 걸쳐 자신이 경험한 위안소의 모든 것을 담담하게 털어 놓았다. 하지만 그 역시 "조선에서 속아서 끌려 온 그녀들"을 추억하는 장면에서는 목소리가 떨린다.
 
"본명은 모르지만 '미도리'라는 이름을 가진 위안부가 나에게 울먹거리면서 '고향에 꼭 부쳐달라'며 소포를 건네 줬지요. 그 땐 그 정도 였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게 그녀 고향으로 잘 갔는지 지금도 마음에 걸립니다."
 
마쓰바라 씨는 언론에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말한다. 평화운동을 계속 해 왔기에 언젠간 말할 날이 오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다 보니 미뤄졌다. 
 
하지만 지난 1998년 당시 농수산성 나카가와 쇼이치 장관의 "종군위안부는 없었다"는 발언에 양심고백을 결심했다.
 
구 일본군 군속으로 위안소의 이용자이면서, 또 그 위안소를 관리하는 일을 맡아본 마쓰바라 마사루 씨. 그가 회고하는, 참혹하고 소름돋는 일본군 위안부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인터뷰는 2010년 4월 21일 지바 현 아비코 시 모처에서 1시간 10분에 걸쳐 진행됐다.)
 
- 오늘 이렇게 시간 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먼저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립니다.
"저는 마쓰바라 마사루라고 합니다. 지금은 노랫말을 만들고, 또 시민단체 활동도 하고 있지만 1942년부터 44년까지 남태평양 북 마리아나 제도의 트럭제도에서 군속으로 복무했지요. 도쿄에서 따진다면 3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입니다. 트럭제도는 크게 11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본에서는 이 4개 섬을 하루, 나쓰, 아키, 후유시마라고 불렀지요. 왼쪽은 게쓰요시마를 중심으로 7개 섬이 있었지요.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외곽길이는 약 240킬로미터에 달했습니다."
 
- 위안소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병참기지, 그러니까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나쓰시마에 위안소가 두 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남국료(南国寮), 또 하나는 남성료(南星寮)였습니다."
 
- 그 위안소는 누가 관리했습니까?
"나쓰시마 일대가 제4해군함대의 기지였는데 이곳(나쓰시마)는 병참보급기지였어요. 제가 배속된 곳은 제4함대 시설부대였습니다. 부대장은 하기와라 간이치 대좌였지요. 제4함대 시설부대라는 건 제4함대에 소속된 부대입니다. 제4함대 사령장관은 고바야시 마사시 해군중장이었습니다. 제가 배속받은 이 시설부대가 위안소를 관리했습니다." 
 
- 시설부대는 위안소 관리만 했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위안소도 관리했지만 본국(일본)에서 넘어 온 죄수들도 관리했습니다. 한 700명 정도? 그들은 주로 잡역을 했습니다. 그 외에 한국에서 그러니까 당시엔 조선인데요. 조선에서도 많은 수의 장정들이 왔었습니다. 그들은 일을 시켜준다는 말에, 그러니까 결국 속아서 온 셈인데 아무튼 다들 같이 사역을 했습니다. 유사시 인적지원이라는 명목으로 평소에 일을 시킨 것이지요. 아무튼 위안소, 위안부, 죄수 등은 전부 제가 소속돼 있던 시설부대가 관리했습니다."
 
- 보통 시설부대라면 공병을 쉽게 떠올리기 마련인데 마쓰바라 씨가 있었던 곳은 사람도 관리했다, 그런 의미네요.
"그렇죠. 우린 시설부대니까 막사나 도로, 항만, 비행장 같은, 그러니까 토목건축도 다 했습니다. 그것도 하고 아까 말한 그런 것도 하고... 사실 뭘 짓고 그러는게 결국 노동력이 필요하니까요. 일본인 사역자들도 꽤 있었습니다. 물론 한국인들이 더 많았습니다만..."
 
- 시설부대가 위안소도 관리했다는 것인데 당시 위안소는 어떤 사람들이 드나들었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이 일본군 위안부를 하고 있었나요?
"(겉옷 안쪽 속주머니에서 증명서를 꺼내며) 이게 남국료 출입증입니다."
 
- 남국료라면 아까 위안소라고 말씀하신...
"네. 그렇습니다. 저는 남국료를 담당했고 또 남국료를 사용했습니다. 이 출입증은 당시 실제로 사용했던 원본입니다. 계속 가지고 있었지요."
 
- 출입증 겉면에 적혀있는 내용은 어떤 의미입니까?
"여기 적혀있는 건, 먼저 가장 왼쪽이 남국료출입증,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있으면 남국료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하기와라 부대라고 씌여져 있습니다. 부대장 이름이 하기와라 간이치여서 하기와라 부대입니다. 인감이 그 밑에 찍혀 있지요. 원본인데 원래는 반납하지 않으면 안되는 건데 몰래 가지고 귀국했지요."
 
- 위에 이 번호는?
"그건 발급번호입니다. 갑제511호. 모두 이런 번호가 찍혀져 있습니다. 관리번호지요."
 
- 쇼와 18년에 발급받았네요.
"네. 서기로 따지면 1943년이고, 11월에 발급받았습니다. 발급날짜가 출입증 옆에 씌여져 있는 것이죠."
 
- 1943년이면 태평양전쟁이 한참 일어나고 있었던 때입니다.
"그렇죠. 전시상태였죠.(사이) 이듬해, 그러니까 1944년 2월 17일과 18일 양일간에 걸쳐 미군 폭격기의 대공습을 받았어요. 여기, 나쓰시마가 거의 궤멸됐습니다. 위안소도 물론 공습피해를 받았습니다."
 
- 대공습으로 사라질 때까지 위안소는 계속 있었나요? 그러니까 마쓰바라 씨가 처음 여기로 갔던 1942년에도 위안소는 있었던 겁니까?
"계속 있었습니다. 남국료와 남성료 둘 다 있었어요. 각각 5, 60명 정도 위안부 여성이 있었습니다. 남성료는 육군이 이용했고 남국료는 해군이 이용했습니다. 저는 제4함대 소속이었기 때문에 남국료를 이용한 것입니다. 여기(나쓰시마)는 또 함대기지였기 때문에 해군장병들이 특히 많았습니다. 언제 출격할지 모르니까 그 전까지는 마음껏 즐겨라 그런 분위기가 있었지요. 육군은 주로 하루시마(나쓰시마의 북쪽에 위치한 섬)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하루시마에는 죄수들도 같이 있었습니다."
 
▲  마쓰바라 씨가 직접 그린 당시 트럭제도 일대. 그의 증언에 따르면 지도 오른편에 보이는 나쓰시마(夏島)라는 곳에 두 곳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jpnews

 
- 아까 나쓰시마에 남성료, 남국료 둘 다 있다고 했는데요. 그럼 육군은 배를 타고 와서 위안소를 이용했다는 건가요?
"그렇죠. 거리상으로 그리 멀지 않으니까 조그만 배도 자주 왔다갔다 했습니다. 트럭제도 동쪽 4개 섬만 놓고 보면 위안소는 나쓰시마에만 있었으니까. 꼭 위안소가 아니더라도 하루시마, 후유시마(나쓰시마의 남쪽에 위치한 섬)에 주둔중이던 군인들은 자주 나쓰시마로 놀러 왔습니다."
 
- 놀러?
"아, 네. 여긴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요코스카 미군기지 같은 그런 개념인데요. 환락가가 있어요. 보통 상점들도 줄 지어 있고, 학교는 물론 신사까지 있었습니다. 일용품이나 그런 건 다 살 수 있어요. 술집이나 요정도 물론 있었지요."
 
- 그 군인들이 나쓰시마에 와서 놀았다는 것은 결국 다른 섬에는 그런 시설이 없었다는 거네요.
"네. 하루시마, 후유시마는 그냥 기지만 있었죠. 그러니까 다들 놀고 싶을 땐 나쓰시마로 건너 왔습니다."
 
- 위안소는 그런 군인, 군속들이 주로 이용했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 마쓰바라 씨도...
"네. 저도 물론 이용했습니다."
 
- 위안소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이용할 수 있었나요?
"영업시간은 기본적으로 12시부터 22시까지 였습니다. 22시에 일단 영업은 끝납니다. 단, 일반사병들은 18시까지만 이용하도록 돼 있습니다. 귀대해서 이것저것 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 외 하사관이나 장교, 저희같은 군무원들은 22시까지 이용할 수 있었고 또 자고 가는 것도 허용됐습니다."
 
- 위안소는 매일 운영됐나요?
"네. 매일 열었어요."
 
- 공휴일은 없었습니까?
"네. 그런 건 없었고, 다만 한 달에 한 번씩 성병검진이 있었어요. 위안부 여성들은 이 때만 영외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해군병원에서 검사를 받았으니까요. 해군병원은 위안소에서 한 2킬로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트럭으로 가면 금방 가지만 걸어서 갔어요. 어차피 도망가지 못하니까 천천히 걸어가면서 시원한 공기도 좀 쐬고 그래라 그런 것이었지요."
 
- 도망가지 못한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섬이니까요. 사방이 바다니까..."
 
- 하루 10시간씩 매일 그런 일을 강요해 놓고 한 달에 한 번 시원한 공기 쐬라고 인정 베풀 듯이 그랬다는 건 좀 그렇네요.
"해군은 위안부에 대해서 그나마 그런 감정같은 게 있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쯤은 그런 해방감을 맛봐라 그런 기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30일간 줄곧 한 군데서만 지내야 하니까. 그렇게 병원을 가는 위안부 여성들도 그 때만큼은 파라솔도 펴고 오랜만에 바깥구경한다고 즐거워했었습니다. 하지만 금방 또 같은 짓을 반복해야 하니까. 위안소로 돌아가는 그녀들을 보면서 저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무엇보다 다들 20살 안팎인 게 참 그 뭐랄까..."
 
- 하지만 마쓰바라 씨는 그녀들을 관리해야 하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그게 오히려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저에게 마음을 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또 눈물도 보였습니다.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 것이 너무 슬프다, 돌아가고 싶어도 못 돌아간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 돌아가고 싶어도 못 돌아간다는 무슨 말입니까?
"그건 그녀들이 위안소에 어떻게 왔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사실 위안부들은 모두 속아서 왔어요. 모집공고가 붙는데 위안부 모집한다는 문구는 그 안에 없습니다."
 
- 그럼 어떤 문구를 넣죠? 그 모집공고라는 것에.
"보통은 고급장교의 메이드(하녀)를 모집한다던가, 병원에서 사무 볼 사람을 찾는다는 그런 내용들입니다. 그러니까 위안부들은 결국 속아서 온 겁니다. 게다가 월급이 30엔, 숙박료도 식대도 필요없다고 하니까 다들 응모하는 겁니다."
 
- 월 30엔이면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얼마나 됩니까?
"지금 얼마나 할 지는 모르겠는데, 그 당시 초임, 그러니까 중학교 졸업하고 취직했을 경우 초임이 45엔이었으니까..."
 
- 30엔이면 꽤 높은 급료네요.
"그렇습니다. 30엔이면 상당히 좋은 수준입니다. 그러니까 다들 거기에 속아서 오는 겁니다. 30엔이나 받는데 숙박료, 식대 다 무료니까 아, 이 돈 모아서 고향에 부쳐주면 되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응모하는 겁니다."
 
- 연령대가 어떻게 되던가요?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보통 18세정도부터 많게는 25, 6살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아주 어려 보였습니다."
 
- 아까 한 위안소에 60명정도 있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약 120명이라는 말이 되는데, 국적은 어떻게 됩니까?
"일본인도 있었습니다. 그 외엔 전부 한국이었지요. 일본인 비율은 약 10% 정도였습니다."
 
- 90%가 한국인, 그럼 적게 잡아도 조선에서 속아서 온 여성들만 100명 이상이 있었다는 거네요.
"네. 그렇습니다."
 
- 아까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게 가장 슬프다 그런 말씀을 들었다고 하셨는데, 그 외엔 어떤 말들을 들었는지 혹시 기억나는게 있습니까?
"보통은 그런 말들인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일단 여기 와 버리면 끝이라는 겁니다. 인생이 끝나는 거예요. 속아서 남태평양 섬까지 왔는데 돌아갈 가능성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사방은 바다고... 결국 그녀들은 희망이 사라져버린 겁니다. 저는 군무원으로 왔지만 저조차 돌아갈 수 있을지 장담을 못했어요. 저만 해도 그런데 하물며 위안부들이 어떻게 자력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절망적이지요. 또 군에서 그녀들을 돌려보내지 않아요. 절대로."
 
- 그건 왜 그런 거죠?

"돌아가면 거짓말이 탄로나니까요. 고향에 가서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모집공고 거짓말이다, 속으면 안된다고. 그러니까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 그러면 평생 여기 있다가 죽어라, 뭐 그런 겁니까?
"그렇습니다. 평생 여기서 그렇게 강요당하다가 죽어가는 겁니다. 육군의 경우를 보면 작전지역에 위안소를 만듭니다. 작전기간 중에 짬을 내서 위안소를 이용하는 거지요. 그런데 작전이 끝났습니다. 후퇴를 해야 한다고 칩시다. 그럼 데려갈까요? 아니예요. 위안소도 위안부도 버리고 갑니다. 군대만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겁니다. 아무 것도 없는 폐허가 된 땅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이지요."
 
- 섬은 더 고통스러울 것 같습니다.
"네. 실제 44년에 대공습이 있었습니다. 다 날아 갔어요. 위안소는 그나마 피해를 덜 받았지만 대부분의 청사, 창고 등이 폭격을 받았어요. 2000기가 떴으니까 엄청난 공습이었죠. 문제는 식료품이 사라졌다는 것. 물탱크도 박살났고... 하지만 섬이니까 도망칠 데가 없어요. 공습이 또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속에서 죽어가는 겁니다."
 
▲ 마쓰바라 씨가 활동하는 '아비코 평화네트'의 회원들도 인터뷰에 동석했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마쓰바라 씨는 위안소 관련해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직접 이야기도 하고 그랬다니까 위안소 관련 업무를 전문적으로 했을 것 같은데요.
"네. 저는 제4해군함대 시설부대 경리과에 있었지만 위안소 관련해서는 직접 필요한 물건을 나르기도 했지요. 다른 일도 다 했습니다. 위안소를 위해서 특별히 뭘 했다 그런 건 없습니다."
 
- 아까 위안소 출입증을 보여주셨는데 그건 보급품이나 그런...

"아닙니다. 그건 위안소를 이용할 때 제시하는 증명서 같은 겁니다."
 
- 출입증은 일본군이라면 누구나 지급받았습니까?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출입증은 저같은 군무원만 받습니다. 군인은 이걸 보여주지 않아도 군복을 입고 있으니까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지요. 출입증이 필요없는 겁니다. 저희는 사복도 입기 때문에 이런 출입증을 발급받는 겁니다. 일반인들과 구별하기 위해서죠."
 
- 요금은 지불하나요?
"네."
 
- 얼마 정도인가요?
"잘 기억나지 않는데... 1, 2엔 정도였던 것 같네요. 아니, 아마 1엔이었던 것 같습니다."
 
- 일본 우익들 논리중에 하나가 위안부들이 성매매를 통해 상당한 돈을 벌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손을 내 저으며) 그건 말도 안되지요. 군인이 무슨 돈이 있다고."
 
- 요금은 위안부에게 직접 건넵니까?
"아뇨. 요금소가 있어요. 나쓰시마에 있었던 위안소, 그러니까 남국료, 남성료는 둘 다 길다란 단층짜리 막사 대여섯동이 죽 나열된 형태입니다. 1개 막사에는 보통 10개에서 12개 정도 방이 있는데 위안소 주위에는 울타리같은 게 쳐져 있어요. 정문에 가서 출입증을 보여주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방 번호표를 받아야 하는데요. 그 번호표를 주는 곳이 요금소라는 곳입니다."
 
- 방 번호는 뭡니까?
"위안부 여성들이 거주하는 방입니다. 막사 1개 동 내부구조를 보면, 길다란 복도가 하나 있고 그 복도를 따라 조그만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각 방마다 몇 호인지 적혀져 있어요. 복도 끝은 세면장과 화장실입니다. 방 크기는 하나당 4조(약2평) 정도? 왼쪽 구석에 매트리스 침대가 하나 있고 조그만 탁자가 하나 있습니다."
 
- 그럼 그녀들에게 직접 주는 건 아무 것도 없나요?
"네. 방 번호를 건넬 뿐이지요."
 
- 돈을 직접 건네지 않았다는 말이네요.
"돈은 요금소에 냅니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남국료는 그랬어요. 아무튼 그런 시스템이란 것을 생각해보면 그 돈이 실제로 위안부들에게 건네졌는지 아닌지 아무도 모르지요."
 
▲ 마쓰바라 씨가 직접 그린 위안소 평면도. 왼쪽에 요금이라고 적혀진 곳이 요금접수대이다. 군인, 군속들은 요금소 앞에서 길게 줄 섰다. 요금을 내면 방 번호표를 받고 오른쪽 복도를 지나 지정된 방으로 들어간다. 방은 다다미 4장 정도의 크기로 가재도구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복도 끝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2부 - "군 부대가 위안소 관리했다" 구 일본군 군속 최초증언







 

ⓒ 일본이 보인다! 일본전문뉴스 JPNews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기사입력: 2010/04/22 [20:03]  최종편집: ⓒ jpnews_co_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쉬발 weqe 10/04/23 [11:58]
아놔.. 죽이고싶당 일본색끼들..글고 부카니스탄도 죽어랏 수정 삭제
아 정말.. 범범 10/04/23 [12:25]
분노가 치밀어 오르네요... 수정 삭제
이기사가... cpt 10/04/23 [13:15]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수정 삭제
개쪽.빠리 새끼들.. 18181818 10/04/23 [13:30]
치가 떨린다...
진짜 죽이고 싶다..
읽는데 눈물이 나려그러네...
지금 나보다도 한참 어린나이의 여자아이들을 ... 수정 삭제
역시 좋은 기사입니다 장쾌 10/04/23 [13:52]
한국측의 증언 말고도 일본측의 증언, 증거도 볼 수 있는 이런 기사는 흔치 않죠
제이피 오는 이유중에 하납니다 ㅎㅎ 수정 삭제
존경심... akia 10/04/23 [13:55]
이런 인터뷰에 응한 마쓰바라씨에게 존경심을 표합니다. 이런 일본인들의 진솔함과 용기를 접할때마다 역시 일본은 강하구나 느낍니다.

자...이제 우리 이야기를 해보죠. 조선인 처녀를 속여 지옥으로 보낸 조선인 브로커에 대한 이야기는 왜 피합니까? 그들의 명부는 아주 간단히 확인할 수 있어요. 조선인 위안소 경영자도 있었던 사실은 또 어떻구요...80년대 미군부대 양공주에대한 르뽀 기사나 소설, 영화를 보면 돈 때문에 속아 미군기지로 흘러들어가 인생막장으로 끝난 수많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정말 똑같아요. 수정 삭제
일본어로 기재 된 기사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lierre 10/04/23 [14:08]
일본인 중에는 위안부 존재사실조차 인정하지 않거나, 인정한다고 해도 그 진상을 부인하고 왜곡하는 경우가 많은데 개인적으로도 주변 일본인들에게 이 기사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실제 일본 증언자의 말이라, 기사에 대한 반응이 어떨지요.. 증언 형태로 기사를 올리시다니 현명하신 선택이었던것 같습니다. 뒤에서 응원하겠습니다! 박철현 기자님 화이팅! 수정 삭제
문제는 10/04/23 [14:58]
그래도 문제는 역시 우익 꼴통들이라는거.... 수정 삭제
아.. 정말 슬프네요. 너구리 10/04/23 [16:57]
일본 정부는 세상이 뒤집어져도 사과, 보상은 해 주지 않을듯 하고..

저런 분이라도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몇년 전 료코 이야기가 미국에 교과서 채용이 논란이 있었는데, 그 옆에 이런글 실어 넣고 싶군요. 수정 삭제
일본 교과서에서 종군위안부 내용을 삭제한다네요.. 10/04/23 [17:45]
정말 뻔뻔한 민족이지요.. 일본정치가도 문제지만 무관심하거나 가만히 묵인하고 있는 일본 국민들도 똑같은 존재입니다. 수정 삭제
아그런데... dsdfsh 10/04/23 [18:02]
일본인들은 자기나라를위해 속이기만 하지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데
이 할아버지는 솔직하네요
그런데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 정말 죄송합니다ㅠ 제가 죄책감을 느낍니다ㅠ 수정 삭제
이런 기분에 살인이 일어나는구나. 인간병기 10/04/23 [18:12]
부르르르르를르르ㅡ르............. 수정 삭제
후..........정말 .......... skfjslk 10/04/23 [18:14]
읽으면서 정말 계속 화가났다.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가서 항의하는 것도 단순한 보상을 바라는게 아니라 진심어린 사과를 바라는 것이다.그 때 위안부로 들어갔을 때 쯤이 대부분이 내 나이 었을텐데 얼마나 절망으로 살아 오셨을까 ............... 수정 삭제
쫏뽄!!쪽빠리 새끼들~~!!! 대냐뿌냐 10/04/23 [18:20]
김정일은 뭐하냐~!!!얼른 일본 한가운데 도심 심장부를 미사일로 없애버려라~!! 수정 삭제
우리 나라 여자들이 스스로 원해서 위안부가 되었냐???? 진짜 너무 하다... 10/04/23 [19:03]
종군 위안부가 아니라 나라가 멍청하고 힘이 없어서 강제로 끌려가서 몸을 바친 강제 위안부다.... 수정 삭제
이딴것좀 그만좀 올려 보는데 열받게시리 아 열받게 10/04/23 [19:11]
볼때마다 열받는데 이제 그만좀 올려이런기사 이젠 지겨울라고한다.이제 연관된 사람들은 다죽거나 죽을나이 되지 안앗나? 수정 삭제
아나 222222222222222222222222 10/04/23 [19:48]
화나네요
수정 삭제
지구상에서 없어져야할 족속들입니다. so cool 10/04/23 [20:14]
일본하고 중국만 없어도 동아시아는 아주 평화로울 겁니다.그리고 akia.이상한 쪽으로 물타기 하지마라. 수정 삭제
종군 위안부가 먼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실은.. 10/04/23 [20:49]
한국에도 불과 얼마 전까지 수많은 여성이 종군 위안부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직업소개소에서 가정부 모집한다고 유인하고 고소득 있다고
유인하고...길거리에서 납치도 하고..그렇게 모아서 집창촌에 팔아먹지.. 수정 삭제
그리고.. 실은. 10/04/23 [20:53]
방세다 화장품값이다.,하며 강제로 빚을 떠넘기지..그렇게 이용해 먹다
또 다른곳에 팔아먹고...결국 섬같은 곳으로 가지..
어때..모집 방법이나 착취하는 방법..피해 여성들에 대한 대우..

종군 위안부와 무엇이 달라? 그녀들이 탈출해서 인근 경찰서에
도움을 요청하면? 88올림픽때 외국인 여성 기자가 쓴 기사가 하나
있다..여교사가 납치되어 집창촌에 끌려갔다..탈출해 인근 경찰서에
도움을 요청하면..경찰이 포주를 불러 그 교사를 인계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서 하는 말...아가씨 관리 잘해.. 수정 삭제
아가씨가 도망가면.. 실은. 10/04/23 [20:56]
포주들이 오히려 경찰에 신고한다..그 강제로 받은 차용증으로
돈떼먹고 도망갔다고..그럼 경찰이 잡아주지..검찰이 법정에 세우지..

오죽하면 어떤 판사분이 그건 돈떼먹은게 아니고 인신매매다..하고
한탄하셨겠니..이런 나라가 종군 위안부를 떠들어?
요즘은 그래도 정신대하고 구별은 할줄 아나 보네..다행이다. 수정 삭제
짐승같은 놈들 죽일놈들 10/04/24 [18:43]
일본은 언젠가 망한다
구천에 떠도는영혼들이 너희 쪽바리들을
저승으로 데려 갈날이 머지 않았다
수정 삭제
저 증언하는 분도 결국 이용했네요. 어이없네요 10/04/24 [20:03]
난 또 자기는 이용 안하고 그런말 하는줄 알았네요, 나원 참 결국 같은 사람이면서 하지만 증언이라도 해주는건 감사합니다. 수정 삭제
그래도 증언을 해주니 고맙네요 그리에르 10/04/24 [22:03]
과연 나라면 옛날에 멋모르고 한짓이 나이들고 부끄럽고 죄스러운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을때 얼굴밝히고 피해당한사람들에대한 진실을 말하기가 쉬울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수정 삭제
진짜 그 어린 여자들이 무슨 죄라고 ㄱㄷ 10/04/24 [23:22]
일본놈들은 상상이하의 짓거리들을 하고 다녔구만 ㅉㅉ 수정 삭제
일본 나쁜놈들 말이않나오네요 10/04/25 [00:46]
일본은 이런 악행을 하고도 뻔뻔하게 오리발 내미는것들입니다
지들도 똑같이 당했음 좋겠네요 수정 삭제
영어, 일어 번역본도 제공되면 좋겠습니다 hope 10/04/25 [01:57]
기자분과 증언해주신 분들의 용기에 박수를...영어, 일어 번역본도 함께 제공되면 참 좋겠습니다. 수정 삭제
지진 한방으로 다 죽여버려 호호 10/04/25 [03:09]
일본에 거대 지진이 나서 다 쓰러지면 만사 오케이인데.. ㅋㅋㅋ 하나도 남김없이 뿌리채 다 뽑혀서 일본놈들이 살려달라고 울부 짖을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손 모가지를 잘근 잘근 밟아주면 되는거지~ 잇힝~ 완전 최고야 ^_^ 수정 삭제
웃기는 건 말이지 남행열차 10/04/25 [04:07]
참 이럴 땐 입에 게거품 물고 흥분하지만 여기서 광분하는 사람들 중에 상당한 비율로 일본 문화에 젖어있는 사람들 많다는 데에 내 전재산 건다.
쪽발이 노래에 에니메이션하며 쪽발이풍 패션 등등... 아니라고? 허? 과연 그럴까? 수정 삭제
마음아프네요...... 나원참.. 10/04/25 [09:18]
그 어린 나이에....... 여자로서 그런 일을 겪고.. 한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죽어가신... 수정 삭제
미국놈들을 조지지 않으면... 오메불망 10/04/25 [19:24]
종전하면서, 미국놈들은 일본전쟁의 책임자들에게 여러가지 이유로 면죄부를 주었읍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위안부문제입니다. 이것은 작년에 밝혀진 극비문서인 일본내 미군핵 반입허용과 절대 발설금지.....그리고, 일본군의 육이오 전쟁 참전댓가(실제로 전사자도 있습니다. 하나는,미군작전지역의 기뢰제거와 둘째, 세균전 수행에 따른 731부대의 동원)로 종전 정리 책임에서 제외된 사항들입니다. 독도를 보면 정확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이미, 독도는 일본으로 넘어간 것과 같습니다. 때가 아직 아닐 뿐이죠. 선언만 남았다는 겁니다. 위의 주요한 세가지 문제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배제하면 전혀, 답이 않나오는 겁니다. 일본이 위 주요한 문제에서 증인, 문서, 역사적 사실등등..이 있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경제대국이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턱도 없는 짓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사실은, 그 배후에 미국과의 밀약이 있는 겁니다. 백날, 일본에게 뭐라해봐야..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미국이 한국의 편을 든다면, 일본은 찍 소리 못하겠지요. 허나, 미,일간의 밀약은 밝혀지면 미국이라는 나라의 본질을 드러내는 상당한 충격을가진 폭탄이기때문에,,미국의 힘이 한국과 일본에서 사라질 때나 되야 이루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뭐든지, 힘이 없으면 먹힙니다.
대포ㅡ,총..그런 것만의 전쟁이 아닌, 경제 전쟁, 외교 전쟁...질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독도는 미국의 태평양 전선의 최전방입니다. 독도가 만일의 경우에 북에 넘어간다고 하면,,,미국의 태평양 전선은 일본열도에서 뒤로 물러나야만 합니다. 독도를 중심으로한 해역이 자원 문제도 있지만, 역시 미국의 이익이 물려 있는 이유로 미국은 일본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이지요. 수정 삭제
위에 남행열차님.. 오매불망 10/04/25 [19:45]
자신의 감정을 그렇게 들어내면,,,제가 볼때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댁을

욕할 것입니다. 전 재산같은 거 걸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분들도 계시겠지만,,,그렇지 않은 분들도,,,일본의 본질을 아시는 분들도

대 일본 문제의 뒷 배경을 인식하고 계시는 분들은 적습니다. 이것은 고의적

인 정보 왜곡의 결과입니다. 이런 사실이 이제서야 서서히 알려지고 있는

시점입니다. 역사를 왜곡하는 것도 역시 관련되어 있습니다. 최근,,,일본은

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만...(그 연장선상에서 민주

당에서 의해서 일본,미국의 핵밀약이 폭로 되었지요.) 60년의 깊이라...

애를 먹고 있씁니다. 잘못하면 일본은 미국으로 부터 버림받고,, 갈 데 없는

고아가 될 지도 모릅니다. 그 옛날, 미국과 중국의 수교로 대만이 토사구팽

되었습니다. 유엔 축출, 국가 지위 상실(외교권없음)등등,,,거지가 되었지요.

일본이 그 뒤를 따를 가능성과 함께, 한국 역시 그 뒤를 따라가는 처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미국에 의지하는 군사력, 그 덕분에 일본, 한국 두나라는

오랫동안 아세아에서 경제적 성장을 보장받아 왔습니다.(물론 댓가는 컷지요.

공짜가 어딨습니까?? 일본뉴스보세요. 부모에 의한 아동학대와 살해.자살..

복지, 의료혜택을 못받아 자살하는 경제 대국 일본의 현실..한국, 올해부터

자살 1위입니다. 하루,,30여명!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미국의

생존을 위해서 토사구팽되는 법입니다. 자국을 위한 군사력을 가지지 못하면

경제, 외교 모두 헛소리죠. 미국의 노선을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대만과의

외교단절로 일본, 한국도 대만과 외교관계를 끊었을 때, 대만인들이 그랬지

요. 의리도 없다고..ㅋㅋ..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인 곳이 세계 정세의 현실입니다. 아무 죄도 없는 이라크의 개박살(후세인

도 한 때, 친미였었지요. 뒤늦게 정신차리려고 했지만...) 이란이 군사력이

없었다면,,,이란도 역시 개박살 났을 겁니다. 아프카니스탄..마찬가지지요.

군사력이 정의를 만듭니다. 역사를 쓰지요. 일본도 미국의 힘을 업은 경제력

으로 한일관계에 있어서 그들의 역사를 그들의 힘으로 써가는 겁니다.

역사는 승자의 것입니다. 옳고 그른 윤리적인 문제는 압도적인 힘앞에 아무런

제재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일본의 저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한국이 일

본보다 강력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간단한 거지요. 한국은 일본보다 국력

이 약한 나라입니다. 센놈이 약한놈을 먹겠다는 건데,,, 일본놈들은 이상하

다. 쪽발이다. 해봐야 웃기는 이야기지요. 지난, 일본의 역사교과서 선언은

사실, 자주국가에 대한 선전 포고와 마찬가지입니다. 힘으로 제압 하지 못하

는 한,, 나머지 항의,,어쩌구,,하는 것들은 죄다 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다 알고 있지요. 김형오국회의장이 해방후 처음으로 독도

갔다고 해서, 그게 강력한 대응이 될 리가 만무 한 겁니다. 확실히,

쇼지요. 무엇보다 그리고 그 배후에서 미국이 한국,일

본을 이래저래 조절하는 형국이었던 것입니다.


한국의 (일본도 마찬가지) 근현대사에서 미국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

는 이상, 해결책은 없습니다. 단언하건대.... 수정 삭제
인터뷰 수고하셨습니다. 대한인 10/05/01 [03:40]
인터뷰 하고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부디 하루빨리, 비공식 세계기록(지식e채널)이 더이상 길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수정 삭제
jeje야~ jeje야 어딨니~? asdf 11/07/23 [01:16]
jeje는 왜 이런 기사에는 리플을 안다니~? 어딨니~? 수정 삭제
휴... 12/08/24 [07:12]
인터뷰 감사합니다.

이런 글은 포탈 메인에 떠야 합니다. 수정 삭제
정작 일본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모른다. asdf 12/08/24 [23:11]
일본에 대한 인상이 좋다는 EU나 미국에서조차 위안부 결의안이 나온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위안부 망언을 지껄인 하시모토 도루, 이시하라 신타로, 노다 총리와 이놈들을 지지하는 전일본인들은 결국 그 댓가를 치루게 될 거다.

수정 삭제
양심을 속이는 정말 부끄러운 패배자(loser)들 하박국 12/08/30 [09:17]
일본 총리를 비롯한 우익 정치인들이 위안부는 없었다고 망언을 일삼고 있을 때도 이 기사의 마쓰바라 마사루 씨처럼 전쟁 당시 위안소를 이용한 일본군 또는 군속 출신 노인들은 대부분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이 후안무치한 일본인들의 모습이다. 역사의 현장을 경험한 자들이 아직도 벌겋게 살아 있음에도 일본 정부의 사실 부정, 호도, 망언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자들이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마사루 씨도 마찬가지다. "언젠간 말할 날이 오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다 보니 미뤄졌다"고? JP 뉴스가 섭외하지 않았더라면 무덤까지 가져갔을 것이다. 일본에는 이처럼 양심 선언을 할 용기 있는 자들이 드물다. 다음 세대에게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전범국의 일원이었음이 부끄럽고, 공범이었음이 부끄럽고, 이지메를 당하는 것이 어쩌면 더 두려워서일 수도 있다. 반성할 줄 모르는 완악한 민족, 선진국민이요 세계 최고 민족이라는 자부심 아닌 교만으로 가득찬 인간들, 역사의 증인들이 살아 있고 증거가 있음에도 뻔뻔스럽게 부인할 뿐 아니라 왜곡을 일삼는 범죄자 집단, 이것이 일본의 본모습이다. 일본인들이여, 부끄러운 줄 알아라! 수정 삭제
남자 200만, 여자 20만명을 끌고가 소모품처럼 쓰고 그조차 다 죽이다니 70년전 12/08/30 [10:45]
이 증언조차 빼먹거나 물타기한것 같습니다. 美청문회 증언할 네덜란드인 위안부피해자 오헤르너 수정 삭제
왜놈들은 그 죄값을 후손들이 받는것을 모르는 동물들 순수한 13/07/31 [17:12]
일본이라는 섬에사는 왜놈들은 그 섬에서 왜 지진이 많고 츠나미가 오는지 관심이 없고 뭣에 들뜬재 오락이나 즐기고 진지하지 못한 삶을 살고있습니다.

인간이라고 신뢰할수없고 음란한 일본인들이 남을 못믿어 늘 외토리로 혼자있고 조상이저지른짓에 왜 내가 죄와벌을 받냐고 다지지만,
유전적으로 죄가 흐르기 때문에 그죄값을 다 받아야합니다.
지진해일이 일본의 인간들을 사냥하는것이 자연현상이라고 바라보겠지만
일본에의해 억울하게 죽임을당한 수많은 원혼들이 일본의 멸망을 위해 복수하는겁니다.
.
인류역사상 인간으로 보기 어려운 동물보다 못한짓을 일쌈은 일본종족들.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할것없이 그어느국가의 사람들이 일본인을 정상인들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영토전쟁이나 신념에 의해 벌어지는 전쟁은전쟁이지만 ,일본인들이 저지른짓들은 도저히 용서할수없는 인간이라고 상상할수없는짓들입니다.

일본의 후손들은 앞으로 수많은 죽음이 보여도 스스로 당해도 억울해 하지 말아야합니다.
죽을때까지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고도빌어야 할지경입니다.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폭발과함께 방사능 낙진으로 국가로서의 운명이 이미 끝났습니다.
몇년후 암이나 질병 쓰나미 화산폭발로 일본인들은 그 섬과함께 사라지겠지요. 수정 삭제
인정하는 사람도 있다는 점이 다행일지도.. 다행이다 13/10/05 [19:32]
위안부를 인정한다는거 자체가 정말 다행일지도 모르겠네요.
우리도 다시 힘내서 일본을 이길수 있게 노력해야할거 같아요. 수정 삭제
19/08/14 [20:36]
인간 악마들. 그 이름. 일본인. 수정 삭제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
최근 인기기사
일본관련정보 A to Z
  회사소개회원약관개인정보취급방침 ㅣ 광고/제휴 안내사업제휴 안내소액투자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일본> (株) 文化空間 / (株) ジャポン 〒169-0072 東京都新宿区大久保 3-10-1 B1032号 
Tel: 81-3-6278-9905 Fax: 81-3-5272-0311 Mobile: 070-5519-9904
Copyright ⓒ JPNews. All rights reserved. Contact info@jpnews.kr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