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조'에서 살아남아 44년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북한 축구대표팀의 주전 공격수 정대세(25, 가와사키 프론탈레)가 19일 일본으로 귀국했다.
저녁 9시, 오직 '정대세' 만를 보기 위해 모인 팬과 매스컴은 약 150여명. tbs의 <슈퍼사커>와 tv아사히, 각 스포츠 신문 및 종합 일간지의 기자들이 총출동했다. 전례가 없는 취재열기다.
일본 매스컴이 단 한명을 취재하기 위해 이렇게 몰린다는 것은 쉬이 상상하기 힘들다. 게다가 그는 지금 일본사회의 '적국' 취급을 받고 있는 '북조선'의 선수다.
▲ 정대세를 보기 위해 하네다 공항에 몰린 팬들과 취재진. 약 150여명에 달했다. © 이승열 / jpnews | |
얼마전 가와사키 프론탈레 클럽하우스에서 안면을 튼 <스포니치>의 스다 기자에게 왜 이렇게 많은 취재진이 모였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북한이 44년만에 죽음의 조를 뚫고 월드컵에 진출했다는 상징성, 그 안에서 가장 중심이 된 것이 가와사키의 정대세 선수니까, 이 정도 취재열기는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 있다"고 덤덤하게 말한다.
도착시간을 정확하게 몰라 저녁 7시부터 기다렸다는 일본인 팬은 "새벽에 그 경기(북한 대 사우디)를 봤는데 심장이 정말 다 벌렁거리더라, 전반 34분 슛은 너무나 아까웠다"며 "한국과 북한이 올라가고 또 이쪽에서는 일본이 올라갔으니 동아시아 3국이 아시아를 석권한 셈"이라며 환한 웃음을 보였다.
정치를 넘어서는 스포츠의 힘이 바로 이런 것일까?
9시가 넘어서자 보도진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속 안쪽을 주시하고 있던 내 눈에도 말쑥한 정장차림의 정대세가 포착되었다. 출구를 나오기 직전까지 조금 긴장한 듯한 표정도 카메라의 플래시 세례를 받자 환한 미소로 바뀐다.
보도진을 위해 가볍게 촬영 포즈를 취한 그는 이내 오른편 쪽으로 몸을 돌려 아버지 뻘로 보이는 이는 힘찬 포옹을 나눈다. 재일본조선인축구협회의 리강홍 이사장. 국적 문제로 힘들어했던 정대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또 피파를 줄기차게 설득해 그를 북한대표팀에서 뛸 수 있도록 한 장본인이다. 둘의 힘찬 포옹은 마치 지난 44년의 설움을 씻어내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취재진과의 짧은 인터뷰를 위해 이동하고 있던 그에게 "축하해요"라고 말을 걸었다. 나를 알아본 그도 "감사합니다"라고 밝은 얼굴로 답한다. 구김살 없는 얼굴이지만 결연함도 엿보인다. 일본 매스컴과의 1문 1답에서 정대세는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보였다. 25년 축구인생을 함축적으로 상징하는 웃음과 눈물이다.
25년 축구인생의 전환점(turning point)이 된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최종예선전에, 정대세가 '동아시아' 축구팬들에게 털어놓는 소감을 가감없이 소개하고자 한다.
▲ 별도로 마련된 인터뷰 장소로 이동하는 정대세 선수 © 이승열 / jpnews | |
- 먼저 지금 기분을 말한다면?
"날 취재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매스컴이 모이는 날이 올 줄이야 는 심정이다(웃음). 솔직히 기쁘다."
- 최종전을 돌이켜 볼 때 어땠나?"우리 시합전에 벌어진 한국 대 이란전을 전부가 모여서 봤다. 이란이 선취점을 뽑아내고 낙담을 좀 했었는데, 후반 들어서 박지성 선수가 벼락같은 동점골을 넣었을 때 우리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역시, 과연 박지성 선수다. 그리고 이건 한국팀이 우리에게 준 천금같은 어시스트였다. 그 어시스트를 우리는 골로 연결시키자고, 시합을 나가기 전에 기합을 넣었다. 마지막까지 방어에만 치중하였지만,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았던 우리 선수들의 정신력이 월드컵 본선 진출을 결정했다고 본다."
- 정대세 선수도 결정적인 슛찬스가 있었다."그렇다. 전반 34분. 처음부터 수비에 중심을 두는 시합운영을 할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카운터 펀치는 있어야 하니까. 34분의 슛은 맞는 순간 들어갔다고 보았는데 아쉽게도 막혔다. 우리는 전후반 90분간 2번의 찬스밖에 없었는데, 사우디는 결정적 찬스가 많았다. 하지만 그들도 골을 기록하지 못했다. 실력보다는 운(運)적인 요소가 필요할 때가 있는데, 마지막 시합에선 그것이 우리 팀으로 왔었던 것 같다."
- 시합이 끝나고 바로 핏치위로 뛰어갔다. 어떤 심정이었나?"(교체되어서 나가 시합종료까지) 그 5분간은 내가 살아온 지난 25년간의 축구인생... 그 축구인생이라는 것에...(눈물이 흘러내려 1분간 말을 잇지 못함) 5분이 지나 시합종료의 휘슬이 울리자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울부짖을 수 밖에 없었다. 대표팀에 들어가면서 수많은 고민과 방황을 했었는데, 그 모든 것이 해결되는 느낌이었다. 내 신념을 마지막까지 관철시켰다는 뿌듯함이라고나 할까?"
▲ 인터뷰 도중 흘러 내린 눈물을 닦는 정대세 선수 © 이승열 / jpnews | |
- 팀 분위기, 선수들과의 팀웍에 대해서 말한다면."지난 2년이 마치 10년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좌절과 어려움의 연속이었으니까. 정말 예선전을 치르면서 특히 최종예선전에서는 끊임없이 상대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만 했다. 솔직히 말해 나역시 처음에는 이 팀으로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죽음의 조'였다. 그러나 한 경기 한 경기 해 나가면서 정신력과 집중력이 높아져 갔다. 마지막 경기 끝나고 너나 할 것 없이 눈만 마주치면 부둥켜 안았다. 다이아몬드처럼 굳건하게 뭉쳐진 것이다."
- 월드컵 본선무대에서의 목표는?"아직 월드컵이 남아 있는데 이렇게 울어대서 미안하다. 1년후를 대비해서 실력을 쌓아 나가겠지만 아무래도 상대는 세계적 강호들이다. 거창한 목표보다는 일단 그들이 깜짝 놀랄 정도의 상처자국을 남기고 싶다. 그리고 이후 안정적으로 실력을 쌓아나가 월드컵에 진출하는 아시아의 단골손님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싶다."
- 일본은 4강을 목표로 한다. 그런 식의 구체적 목표를 든다면?"일본은 충분히 4강을 달성할 능력이 있다고 본다. 오카다 감독 역시 그런 목표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팀은 꼭 유언실행(遺言実行, 남긴 말을 실천에 옮긴다는 뜻)을 해주길 바란다. 이런 일본에 비해 우리는 아직 그런 거창한 목표를 세우지는 못한다. 다만 세계의 강호들에게 임팩트를 주는 시합을 하고 싶다. 구체적으로는 일단 1승이 목표고, 나로선 골을 기록하고 싶다는 욕심은 있다."
- 본선에서는 어떤 조편성을 기대하는가?"이왕이면 죽음의 조에 속했으면 좋겠다. 브라질, 잉글랜드, 네덜란드와 같은 조. (일동 웃음) 세계적 강호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고 싶다."
- 한국과 동반진출이다 ."죽음의 조라 불렸던 곳에서 같은 민족인 한국과 동반진출을 하게 되어 정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다. 또 한국이 이란과 비겨 주어서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정말 우리쪽에 준 커다란 선물이었다. 내년 월드컵에서 한국과 다른 조로 빠질 테니까 마음 같아서는 결승에서 만나고 싶은 생각도 있다(웃음)."
- 그나저나 내일(20일, 토) 당장 리그 시합이 잡혀 있다."이런 시간에 돌아왔으니까 내일은 (출장여부를) 잘 모르겠다. 이번엔 기쁜 눈물을 흘렸는데, 사실 지금까지 나비스코컵, 리그, 조선고교, 조선대학등에서 내가 흘린 눈물은 모두 아쉬운 눈물이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쁜 눈물을 흘렸고, 이 기쁨을 가져오게 한 열정과 모티베이션을 소속팀에서도 그대로 유지해 팀을 폭발시키는 기폭제로 사용하고 싶다."
- 마지막으로 월드컵 본선 진출의 기쁨을 누구에게 가장 전하고 싶나?"어머니. 어머니와 전화통화를 했다. 그런데 둘다 울었다. 계속 울기만 하고 말도 안나오고... 어머니가 계셨기에 축구를 할 수 있었다. 어머님 덕분에 이렇게 될 수 있었다. 정말 어머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 다시 한번 축하한다."고맙다. 꼭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도록 노력하겠다."
흔히 축구시합의 성패를 좌우하는 3가지 요소를 선수들의 테크닉과 체력, 그리고 팀차원의 전술이라고 말한다. 이 3가지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면 09년의 fc 바르셀로나 같은, 이른바 사상 최고의 강팀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이 3가지와 전혀 다른 차원인 '정신력'이라는 요소가 있다.
정신력은 원시적이며 그 물리적 측정이 불가능해 경기에 미치는 영향도가 수치화되지 못한다. 그래서 정신력은 현대축구의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다. 아니 애초부터 '원시'와 '현대'는 어울릴 수 없다. 그런데 북한은 지극히 원시적인 '정신력'의 축구로 죽음의 조를 통과해 버렸다.
그러고 보니 북한은 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사다리 전법'이라는 기상천외한 수법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전과를 가지고 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북한의 이러한 '원시적인 축구'가 전세계 축구팬을 놀래키지 않을까 기대된다.
■ 귀국 현장 이모저모
▲ 보도진에 둘러싸여 가와사키의 팬으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기념포즈를 취하는 정대세 선수 © 이승열 / jpnews | |
▲ 가와사키 프론탈레의 팬으로부터 꽃다발을 받는 정대세 선수 © 이승열 / jpnews | |
▲ 재일본조선인축구협회 리강홍 이사장과 뜨거운 포옹을 나누는 정대세 © 이승열/ jp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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