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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리는 물건보다 팔아야 할 것을 팔죠"
[일본 속 코리안파워(3)] 한류 인프라를 만들다, 한국광장 김근희 대표
 
안민정 기자
해외에 사는 한국인들은 명절음식을 어떻게 해 먹을까.
 
명절이 올 때마다 해외동포들 대부분은 향수병을 앓는다. 가족이 그리운 것도 있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따뜻한 명절음식 생각에 간절해지기 때문이다.
 
지금 일본에서는 한국 음식 붐이 불고 있어 전국 어느 마트에서나 신라면, 떡볶이, 잡채, 불고기, 순두부찌개 등의 재료를 손쉽게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 중 대부분은 일본인 입맛에 맞게 개량된 것이고, 한국인 입맛에 맞게 직접 요리하려고 하면 조미료부터 채소까지 재료공수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도쿄 신주쿠 부근에 사는 한국인이라면 이런 걱정은 없다. 현재 한국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것이 그대로 직수입되는 대형마트 '한국광장'이 있기 때문이다.
 
왠만한 한국수퍼에서는 취급하기 힘든 청양고추, 깻잎 등 희귀 채소는 물론이고 갓 담은 김치부터 익은 김치까지 취향에 따라 골라먹을 수 있는 김치, 유학생들에게는 꿈 속의 메뉴 중 하나인 순대, 족발, 삼겹살부터 수십여가지가 넘는 인스턴트 라면, 과자, 젓갈에 뚝배기까지 한국 요리를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한국광장에 있다.
 
혹자는 어느 나라나 한국인이 있는 곳이면 널려있는 것이 한인수퍼인데 왜 굳이 한국광장에 주목하느냐 물을 수 있다. 그러나 현지 사람이라면 한국광장은 단순한 수퍼개념을 넘어서 한국, 한국인, 신오쿠보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한국광장은 2002년 월드컵 이후 불어닥친 뜨거운 한류열풍과 한인타운 형성에 중추적인 주춧돌 역할을 했다는 데서 상징성을 찾을 수 있다.
 
▲ 도쿄 신오쿠보 한인타운의 명소가 된 장터, 한국광장             © jpnews
 
도쿄의 부도심이라 불리우는 신주쿠역에서 도보 10여 분 거리, 노른자 땅에 해당하는 그 곳에 약 150평에 달하는 일본 최대 한국식품점인 한국광장이 있다. 장터라는 간판 그대로 입구에는 참외나 수박같은 과일, 무, 배추같은 싱싱한 채소들이 먹음직스럽게 진열되어 있고, 마트 내부에 들어서면 널찍한 한국의 마트 그대로가 옮겨진 듯 하다.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한국광장에는 통로를 통과하기 힘들만큼 많은 손님으로 북적거린다. 서너개 되는 계산대에는 긴 줄이 늘어서고 한 쪽에서는 배달을 요청하는 사람이며, 두 손 가득 봉지를 들고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일년 365일 24시간 한국 관련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는 곳, 그 곳이 바로 한국광장이다. 
 
한국광장은 신오쿠보 일대에 여러개의 그룹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 서적, 음반, 잡지 등을 취급하는 '코리아 플라자', 고기를 포함한 한국요리 전문점 '고려', 전통공예품을 판매하는 '인사동', 전통차를 판매하는 '코리프라 카페'에 길거리 떡볶이를 먹을 수 있는 분식점 '가나다라'까지 모두 한 회사를 통해 운영되고 있는 것.
 
도쿄에서도 땅값 비싸기로 소문난 이 곳을 한국 일색으로 물들이고, 위에 소개한 모든 점포의 기반을 닦고, 운영, 발전시킨 이는 다름아닌 한국인. 그것도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동포가 아니라 맨주먹으로 일본에 건너가 20여 년만에 신오쿠보를 바꿔놓은 한국인, 김근희 사장(56)이다.
 
▲ 주식회사 한국광장 김근희 사장     © jpnews

김근희 사장은 1980년 대 이후 유학, 사업을 목적으로 일본에 정착한 한국인(그들을 뉴커머라 부른다) 중 가장 성공한 사업가로 꼽힌다. 한국광장은 도쿄 근교 뿐 아니라 일본 내에서도 최대 규모 한국식품점이고, 앞서 소개한 그룹회사까지 합치면 그가 이끌고 있는 직원은 200여 명이 넘는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사업가를 꿈꾸며 일본 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것은 아니었다. 1986년, 일본에 건너와 당시 통상성에 소속된 재단법인 유통시스템 개발센터 객원연구원으로 만 3년 간 연구를 하고, 서른을 훌쩍 넘긴 늦은 나이에 히토츠바시 대학원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정책사를 연구, 박사과정을 수료한 공부벌레였다.
 
그렇게 사업, 장사와는 무연한 생활을 하고 있던 그가 일본에서 한국음식으로 승부수를 띄울 생각을 한 것은 당시 크게 변화하고 있던 세계경제시장 흐름에 기인했다.
 
"제가 연구원으로 있던 당시, 플라자 합의(1985년 선진 5개국이 달러 안정을 위해 환율안정화를 합의), 우루과이 라운드(1986년 세계무역 자유화 촉진을 위한 통상교섭)가 실시되면서 세계 경제질서 재편이 시작됐습니다. 미국은 나프타를 체결하여 북미권을 하나로 만들었고, 유럽은 화폐정책까지 통일했습니다.
 
그 때 저는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한국이 경제대국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한일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고 상호 발전하는 것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한일관계는 역사적 앙금으로 자극하고, 긁어대는 등 싸움만 반복했죠. 그 때 저는 한일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스스로 가능한 일을 하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아직 어린 아들과의 대화에서 힌트를 얻었다.
 
"어느 날 일본과 미국의 배구시합을 시청하고 있는데, 아들이 일본을 응원하더군요. 그래서 아들에게 '너 왜 일본을 응원하니'라고 물었더니 '난 일본에서 태어났고, 친구들도 다 일본인이니까'라며 당연한 듯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빠는 어디를 응원하는데?'라고 아들이 묻길래 '난 미국'이라고 대답했죠.
 
그랬더니 아들이 하는 말이 '아빠는 미국 싫어하잖아'. 사실 저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해서 상당히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미국보다 더 싫으니까'라고 답했더니, 아들이 '그렇게 싫으면 일본에서 왜 살아. 자기 나라 가서 살지'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아니고, 자기나라라고 하더군요. 
 
괜히 심통이 나서 아들 녀석을 쥐어박았습니다. '너 어느 나라가 제일 좋아'라는 물음에 아들이 '한국'이라고 답합니다. 왜냐고 물어보니 '난 한국인이니까'라고 대답하더군요. 그 다음은 어디가 좋냐고 물으니 일본이랍니다. 일본에서 자랐으니까요, '그럼 그 다음은'이라고 묻자 '중국'이라고 답합니다. 자장면과 탕수육이 맛있기 때문이라고, 그 때 머리를 망치로 맞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들은 가끔 아버지와 함께 들르는 중국집이 마음에 드는 듯 했다. 중국은 안 가봤어도 자장면, 탕수육이 맛있으니 중국에 대한 호감이 생긴 것이었다. 그 나라 음식을 먹다보면 자연스럽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김근희 사장은 '그렇다, 김치를 비롯해 일본에 한국음식을 전파하면 분명 해답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계획을 세운 뒤, 그는 일본 국회도서관을 찾았다. 한국에 대한 자료조사를 하러갔더니 검색되는 내용은 전두환,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정치인의 이름 뿐이었다. 한국문화, 특히 식문화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만큼 일본인은 한국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한국음식에 무지했다.
 
김근희 사장은 일본의 한인집단 거주지를 찾아다니며 한국음식 시장에 대한 리서치를 실시했다. 우에노, 미카와시마, 가와사키, 오사카의 츠루하시 등을 돌며 20여 군데 한국식당이나 식품을 취급하는 곳을 조사하면서 그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한국음식을 팔면서도 '한국'이나 '코리아'라는 간판을 내건 가게가 한 군데도 없었던 것이다.
 
"일본에 사는 한국인들은 일본인에게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차별받기 싫어서 일부러 한국을 감추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외국인이라서 불리하지는 않을까 피차별적인 불안감을 느끼지 않았나 하고요.
 
당시 한국인 중에 일본이름으로 바꾸는 사람도 많았고, 자녀들이 이지메 당할까봐 냄새나는 김치를 안 먹이는 부모도 많았어요. 무시 안 당하려고 일부러 일본어만 쓰다보니 한국억양을 잊어버리고, 그런 상황에서 일본에 사는 한국인에게도 한국을 다시 인식시킬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가 벌이고 있는 사업의 목표를 먹거리(食), 언어(言), 놀이(遊), 일(事) 네 가지 테마로 결정하고 한국생활정보 발신의 장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하여 1993년 탄생한 것이 장터, 한국광장. 처음에는 도쿄 닛포리에 작은 매장을 시작으로, 1994년 신오쿠보에 정식으로 오픈했다.  
 
지금은 일본 최대의 한국상점 집결지이자, 한국인 거주지로 명성이 높은 도쿄 신오쿠보이지만, 한국광장이 문을 열 당시만해도 근방에 한국음식점은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고, 문닫은 가게가 대부분인 황무지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충분히 상권이 보장된 곳에 식품점을 열지만, 그는 상식을 뒤엎고 일부러 신오쿠보를 보금자리로 선택했다.
 
"당시 이 지역은 이렇다할 상권이 형성된 것은 아니지만, 저는 각계각층 한국인들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도쿄에 유일한 한국학교가 꽤 가까운 곳에 있으니 가족체재자들이며, 신주쿠에 아르바이트를 다니는 유학생, 대사관 쪽에 근무하는 사람들, 크라브 술집에 다니는 아가씨까지 세대, 직업을 불문하고 전계층을 모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죠.
 
그리고 여기 한국식품점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상권이 형성되리라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그 때까지 필요한 게 있으면 우에노까지 가서 구해왔으니까요. 도심이고, 교통도 편리하고, 그래서 장사가 잘되고 있던 닛포리를 정리하고 신오쿠보로 이사했습니다"
 
신오쿠보를 선택한 것은 김 사장이 맨 처음 구상했던 한일우호관계 성립을 위해서도 적합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한국을 알리고, 보여주고, 느끼게 하려면 그럴만한 장소가 반드시 필요했다. 각계각층의 한인이 살고 있는 이 곳이 한국광장으로 인해 더욱 한국의 색깔을 낼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 되리라고 믿었다.
 
◆ 서울, 도쿄 시차제로. "팔아야 할 것을 판다"

한국인을 모이게 하기 위해 그가 생각한 방법은 '팔리는 물건보다 팔아야하는 물건을 팔자'였다. 일단, 그 때까지 일본에서 전혀 유통되지 않았던 한국 서적을 취급했다. 연애소설부터 신문, 여성패션지, 플레이보이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한국인이 보는 것이라면 한국광장에서도 볼 수 있게 했다.
 
식재료도 '오늘 서울에서 먹을 수 있는 메뉴를 도쿄에서 그대로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이라는 목표아래 그 당시 너무나도 귀했던 채소, 양념 종류를 구비해 놓았다. 한국광장이 생기기 전까지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이나 한국식당들은 제한된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 왜냐하면 일본의 식품관련 취급부문에 외국인의 참여가 근본적으로 불가했기 때문이다.
 
일단 요리 기본이 되는 채소종류를 취급하려면 청과물 협동조합에 가입해야 했는데, 조합원이 될 수 있는 조건 제 1조 1항이 '일본 국적을 가질 것'이었다. 쌀도 주류도 담배도 모두 허가제로 경쟁이 치열하여 외국인에게 돌아올 여지가 없었다.
 
미국 la 등 해외동포가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에는 수퍼마켓으로 성공한 스토리를 종종 들을 수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그런 경우가 전혀 없었던 이유도, 이런 불합리한 제도 때문이었다. 그런데 김근희 사장은 일본 유통시장의 높은 벽을 외국인으로서 처음으로 뚫었다.
 
"운이 좋았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 덕분이었습니다. '김근희 사장은 한국인이지만, 회사는 일본법인이 아닌가'라며 청과물 조합장이 도쿄도에 적극적으로 설득해주었습니다.  
주류는 기본적으로 3년간의 영업실적이 있어야 했고, 같은 지역에서 폐업한 사업장이 있을 때만 추첨을 통해 한 회사에게 유통허가를 내 줬는데, 1년 영업한 제가 운 좋게도 당첨됐습니다. 이건 정말 행운이었죠. 이후 규제가 조금씩 완화되기 시작하여 쌀이며 소금 등이 일부자유화 되었습니다"
 
김근희 사장이 신오쿠보에 처음 한국광장을 개점하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표현했다. 식당도 별로 없는 황무지에 30~40평 규모의 커다란 한국식품점이라니, "여기를 뭘로 채울 거냐"며 조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옳았다. 예상대로 10여 개에 불과했던 한국음식점이, 1년 후에는 한국노래주점을 포함해 60여 개까지 늘어났다.
 
짧은 기간 놀라운 발전을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팔리는 물건보다 팔아야 할 물건을 팔자'는 슬로건이 적중했기 때문이다. 우선 그동안 구경하기 힘들었던 풋고추나 깻잎, 애호박 등 한국채소를 수입하고 연중가격을 고정시켰다. 겨울에는 당연히 원가가 비싸졌지만, 이익을 포기하더라도 꼭 필요한 재료라면 물량을 확보하는 데 집중했다.
 
한국인의 술안주로 제격인 아구찜은 아귀가 없어 내지 못하는 식당이 수두룩했지만 한국광장이 물량을 확보함으로써 고정메뉴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일본인은 여름에 아귀를 잡으면 버리고 겨울에만 먹는 특징이 있다. 이를 눈여겨 본 김근희 사장은 여름에 잡은 아귀를 대량 구입해 냉동시켜 1년 365일 재료가 없어서 못 파는 일이 없도록 했다.
 
한국광장을 시작한 지 16~7년. 한 사람의 지휘하에 한국광장은 재고를 남긴 적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적도 없이 현재까지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30대 중반까지도 지식욕에 불타 공부만 하던 김근희 사장이 실패를 모르는 사업가로 변신할 수 있었던 그 원천은 무엇일까.
 
"물론 저도 실패는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회사를 멍들게 할 정도는 아니었죠. 잘못됐다 싶으면 과감히 손을 뗐습니다. 그 때까지 손해가 얼마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내가 감당할 수 없다면 빨리 접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저는 끈질긴 사람도 영리한 사업가도 못 됩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 밖에는 못 합니다. 제가 손을 대지 않는 분야가 있는데요, '그거하면 떼돈 번다더라'하는 장사와 '제가 잘 모르는 장사'입니다. 남한테 완전히 맡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아예 안하는 것이죠. 팔리는 물건보다 팔아야 할 물건을 판다는 것, 계산을 따지기보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광장을 끌고 올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 24시간 연중무휴, 한국광장은 신오쿠보에 한국음식점을 늘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jpnews

그런 그에게 '진짜 사업가'로서 다시 태어날 것을 다짐한 사건이 2006년에 일어났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무엇이든 한국광장보다 싸다'는 광고를 하며 한국광장 바로 맞은 편에 거대한 한국식품점을 개업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두 개의 한국식품점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다. '한국광장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며 수근대는 소리가 김근희 사장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 때 김근희 사장은 반 자포자기 상태로 '한국광장을 접어야할까'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다른 사업이 있으니 '우리 가족 먹고 살기엔 충분하겠지' 혼자 고민하던 중 정신이 번뜩 들었다. '김근희, 한국광장을 너 혼자 만들었냐? 너를 따라 함께 일한 직원들 일터는 어떻게 할 건데. 200명이 넘는 직원들 다 자르고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이런 생각이 들자 자기 혐오감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정신이 든 그는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이며 재산을 팔아 현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억 엔에 가까운 거금을 들고 사원들에게 "나는 이 돈을 다 쓸 때까지 경쟁하겠다. 일터만은 지켜주겠다"며 전격 맞경쟁을 선포했다. 맞은 편 식품점이 가격을 내리면 한국광장도 내리고, 또 내리고... 그렇게 출혈경쟁 네 달 후, 맞은 편 식품점은 백기를 들고 폐업했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후, 김근희 사장은 자신이 사업가로서 직원을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해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한다. 이후 사원들에 대한 이익분배도 제고했다. '회사는 사원을 잘 살게 하고 사원은 회사를 잘되게 한다'는 슬로건 하에 2007년, 소득의 1.5배 선언을 했고, 2010년에는 기본급 900% 보너스 선언을 했다. 
 
일본 기업 세금은 어마어마한 편으로, 한국광장의 경우 소득 50% 이상이 세금으로 나간다. 세금을 제외한 이익의 절반은 사원을 위해 돌리기로 했다. 이제까지 자신의 목표를 위해 회사가 존재했다면 지금부터는 괜찮은 회사의 좋은 사장이 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 한국 서적, 음반 등을 취급한 원조 한류숍 코리아 플라자(한국광장 그룹)    © jpnews

신오쿠보는 90년대 초반 그가 예상한 대로 일본 내 최대 한국문화발신지로 발전했다. 한국을 느끼기 위해 신오쿠보를 찾는 일본인이 급증했고, 한국광장의 고객도 이제 90%가 일본인일 정도로 분위기가 변했다.
 
이런 모습을 꿈꾸며 처음 신오쿠보에 발을 딛었던 그는, 현재 발전에 대해 "예상을 뛰어넘는 변화"라고 평가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공동개최되면서 일본 내 리틀 코리아인 신오쿠보가 주목받기 시작했고, 한국인들은 응원을 위해 신오쿠보로 몰려들었다.  
 
2003년 겨울연가가 히트하면서 한류붐을 불러일으키며 당시 유일한 한류컨텐츠 숍이었던 코리아플라자(한국광장 자매사)에는 일본인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한류전문숍이 현재는 수십여군데로 늘어났다.
 
"사람들은 한류가 이 지역을 부흥하게 했다고 생각하지만, 이 지역이 있었기 때문에 한류가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실제 최초의 한류붐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였습니다. 일본에 한국붐이 불면서 전국 어디서나 한국 물건을 팔기 시작했죠. 그러나 올림픽이 끝난 후 한국붐은 거짓말처럼 싹 사라져버렸어요. 그것을 발전시킬 장소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인프라 구축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현재 신오쿠보의 모습에 대해 '불안하다'라고 말한다. 양적으로는 팽창하고 있지만 질적으로 성장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과연 이 곳에서 한국의 어떤 품격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한국의 좋은 점을 어떻게 소개하고, 어떻게 즐기게 할 것인가, 그리고 감동시킬 것인가 생각해봐야 할 때라고 말한다.
 
"이 지역 사회에서 어떻게 해야 한국을 좋은 이미지로 어필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이미 새로운 구상을 하고 있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성공사례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퍼져나가게 되지요. 저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제가 할 수 있는 한 좋은 사례를 만들어갈 예정입니다" 
 
김근희 사장의 새로운 신오쿠보 프로젝트는 이제 막을 올린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전진했던 삶, 그런 그가 이번엔 어떤 방법으로 신오쿠보를 바꾸고, 일본인에게 한국을 어필할 것인가. 2011년도 그의 행보에 눈을 뗄 수 없을 듯 하다.
 
▲  한국광장 내부    © jp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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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2/04 [11:31]  최종편집: ⓒ jpnews_co_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정말 훌륭하십니다. 유희천사 11/02/04 [17:33]
멀리 타국 땅에서 한국을 알리기 위해 힘쓰시는 사장님의 모습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지금까지 달려오시며 흘리신 땀방울이 양분이 되어 만 송이의 벚꽃을 활짝 꽃피울 것입니다. 수정 삭제
좋은 기사 감사드립니다 11/02/04 [18:42]
기사 잘 읽었습니다. 멋있네요 수정 삭제
나도 900% 보너스 받고 싶다!!!!!!!!!!!!!!! 바람소리 11/02/05 [16:03]
척박한 일본땅에서 무에서 유를 이룬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요. 무슨 일이든 선구자적 역할을 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수정 삭제
제목이 인상 깊습니다 그러나... 명언입니다만 11/02/05 [23:54]
팔리는 것을 파는 것이 아니라 팔아야 하는 것을 판다.

확실히 무엇을 파는가? 라는 것은 중요한 논점입니다.
그렇지만 기사 내용 본문에도 분명히 있지요.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라고...
한마디로 독불장군식으로 팔아야 하는 것을 판다 라는 것은
시도를 하면 100% 확률로 망한다는 의미 입니다.

기사의 내용은 굉장히 좋습니다.
그렇지만 국내에서도 창업이라던가 기업운영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아지는 만큼 이러한 기사는 흥미로운 기사인것도 사실입니다.

팔리는 것이 아닌 팔라야 되는 것을 판다.
좋은 명언이지만 내용의 중점이 이것이 아니라 인프라 구축의 중요성으로
접근하며 기사가 전개되었다면 더 좋았을거 같습니다.
수정 삭제
참 고마운 가게입니다. 11/02/06 [21:55]
1999년 동경 유학 시절... 주말의 즐거움이라면 전철을 타고 신오쿠보에 있는 광장으로 쇼핑가는게 낙 이었습니다. 한국신문, 한국라면, 한국과자들...고추장... 십년도 넘었지만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고마운 가게입니다... 수정 삭제
장터는 인심을 장사하면서 많이 버렸다고생각한다 장터? 12/05/24 [15:13]
말이야 거창하지만 ,,
결국 돈벌러온 한국술집여성들 타운인,,,가부키죠를끼고 장사를,,,
경쟁점포 가생겼었도 인심을 얻었다면 사람들이그런 수근댐이없었을것이다 수정 삭제
장터가식품점할때,,다른지역에도 식품점하는사람많았다,, 그저운 12/05/24 [15:23]
단지 지역적인 운이좋았을뿐이라고생각한다 ,,
식품점하는사람이 무슨,,거창한 한일관계를 ???
오오사카쯔르하시에도 식품점하던사람많다.. 장터보다먼저 ,,, 수정 삭제
일본" 에서 는 실내" 슈퍼마켓 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잡담" 을 본적"이 없어 윈도쇼핑 14/09/01 [21:38]
가보았는데, 비위생적인 시식 코너" 가 너무 많았고,중년으로보이는 여직원들의 잡담과농담"은 목소리 크게들렸습니다. 같은 한국사람 으로서 부끄러웠고,모니터 하는마음 으로 지적 하는것입니다. 현장에서 말"해줄까 하다가 망설이다가 바쁜" 시간대 분위기 상황 파악 못할까봐"포기했습니다.현지 인들은 호기심 으로 한번 정도" 들러본적 있을지 모르나 두번 은 가지않겠다고 합니다.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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